대북 삐라 살포 금지... 사실은 정부 심리전?
대북 삐라 살포 금지... 사실은 정부 심리전?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0.06.16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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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날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2016년 4월 2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날리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 최선이다” - 『손자병법』 중

심리전은 싸우지 않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최선의 병법으로 손꼽힌다. 물리적 타격력 못지않게 기세 대결이 중요한 전쟁에서 심리전을 잘 사용하면 상대의 허를 찔러 손쉽게 승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는 상륙하지 않는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미군이 원산으로 치고 들어온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린 것이 그 사례다.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삐라(심리전에 사용되는 전단지) 전쟁이 벌어진 건 6·25전쟁이다. 당시 유엔군은 “귀순할 때 이 전단은 신분보장서 역할을 한다”는 내용의 삐라로 투항을 권유했고, 북한군은 마릴린 먼로 등의 여배우가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린다”고 말하는 내용의 삐라로 연합군의 사기를 꺾었다.

그런 삐라가 최근 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2004년 6·4 합의와 2018년 4·27 판문점선언 등으로 정부 차원의 삐라 살포는 중단됐지만, 탈북민으로 구성된 민간단체의 삐라 살포가 계속되면서 최근 북한이 반발 입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지난 4일 북한은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명의로 “탈북자라는 것들이 수십만 장의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측 지역으로 날려 보냈다”며 “못된 짓을 못 본 척하거나 부추기는 놈이 더 밉다”고 남한 정부를 비난했다.

사실 삐라 살포에 열성적이었던 건 과거 북한이다. 6·25 정전협정 이후 경제력에서 우위를 점했을 때만 해도 북한은 남한의 체제 모순을 지적하거나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삐라를 대량으로 살포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파출소에서 삐라를 학용품으로 바꿔주는 등 삐라를 회수하는 데 급급했다. 다만 남한과의 체제/경제 대결에서 경쟁력을 잃은 이후부터 북한에게 대남삐라는 이득 없는 일이 돼버렸고 그런 이유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한을 향해 상호 삐라 살포 중단을 요구해 왔다.

그런 북한의 요구는 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여져 남한의 삐라 살포는 2004년 이후 공식적으로 중단됐다. 다만 민간에선 북한 수뇌부를 향한 반감이 강한 탈북자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삐라 살포가 이뤄졌는데, 최초 전단지에서 점차 (한국 드라마·영화가 담긴) USB, 음식물, 화폐, 등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삐라는 남한의 절대적 우위를 점한 비대칭 전력으로 작용했다. 고립된 상태로 체제 유지를 위해 내부통제에 힘쓰는 북한 정권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 사실. 정부 차원에선 중단했지만, 민간 차원의 삐라 살포를 금지하지 않은 상황을 “못된 짓을 못 본 척(한다)”고 비난한 것도 그런 이유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북한의 반발에 정부는 신속하게 호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통일부는 삐라를 살포한 탈북 단체 두 곳(자유북한운동연합·큰샘)을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한편 법인 설립 허가 취소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고, 청와대까지 나서 강력한 처벌 의사를 드러냈다. 사실 그간 대북 삐라 살포는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는데, 돌연 남북교류협력법을 적용해 처벌하겠다는 전례 없는 강경 조치는 큰 논란을 일으켰다. 최근 10년간 십여 차례 정부 차원의 삐라 살포 규제가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경찰력을 동원해 살포 행위 자체를 제지했던 것이지 이번처럼 법인 설립을 포함한 처벌 의사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일부는 4·27 판문점 합의 등을 근거로 삐라 살포 행위를 처벌한다는 방침이지만, 4·27 판문점 합의가 국회 인준을 받지 못해 강제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삐라 살포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 발의한 ‘삐라금지법’이 처리되기도 전, 삐라 살포를 ‘불법’으로 간주해 일각의 비판과 마주한 상황이다.

삐라 발송은 남한이 지닌 비대칭 전력으로 북한 내부 혼란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효과가 뛰어나지만, 여러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전략적 인내’가 필요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민간단체에 대한 과도한 ‘규제’와 ‘처벌’은 국민적 공감을 얻기 힘들 수 있다. 심리학자인 로버트 치알디니는 책 『설득의 심리학』에서 “설득의 달인들이 선호하는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는 먼저 호의를 제공하고 보답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또 이런) 상호성 원칙의 기본 원리를 살짝 변형한 또 다른 방법으로도 상대의 승낙을 유도할 수 있다. 호의를 베풀어 상대의 보답을 유도하는 대신, 먼저 양보를 함으로써 상대의 양보를 끌어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런 개념은 북한과 삐라 살포를 시도하는 민간단체 모두에게 적용이 가능하다. 삐라 살포를 규제하기 위해 민간단체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삐라 살포 저지에 성공한다면 이를 통해 북한으로부터 어떤 양보를 끌어낼 것인지. 정부의 심리전 능력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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