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이러니… 밤하늘의 ‘어두움 VS 별’
인생은 아이러니… 밤하늘의 ‘어두움 VS 별’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6.0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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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레이먼드 카버에 비견되는 미국의 전설적인 단편소설가 루시아 벌린의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은 인생이란 아이러니함을 말한다.  

수록작 「1965년 텍사스에서의 크리스마스」는 부잣집 부인이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저녁 지붕 위에 벌러덩 누워서 잭 다니얼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부인은 지붕 위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집안일을 돕는 에스터가 부인의 요강을 비워준다. 침울한 부인과는 대조적으로, 지붕 아래에서는 일가친척이 모인 떠들썩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부인이 지붕에 드러누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부인은 남편이 천박한 비서 케이트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부인은 또한 크리스마스에 남편과 함께 버뮤다나 하와이로 여행을 떠날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부인이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서 한다. 알콜중독자인 남편의 남동생과 역시 알콜중독자이자 남편에게 근친상간적 감정을 품고 있는 여동생을 초대하고, 부인이 그토록 회피했던 친정의 식구들을 불러 모은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부인은 좋은 집에서, 화려한 파티 속에서 홀로 몹시도 고통스러워한다. 

아이러니한 상황은 계속된다. 새로 온 가정부인 멕시코 출신 루페가 상아 손잡이가 달린 식칼들을 훔쳐 후아레스로 가는 다리를 건너다가 훔친 식칼에 찔려서 죽는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허리를 굽혔다가 실수로 찔린 것이다. 

루페에 대한 연민에서였을까. 위스키에 취한 남편은 그날 밤 친구와 함께 경비행기에 선물을 잔뜩 싣고 멕시코로 건너가 아이들에게 선물 폭탄을 내리고 돌아온다. 그런데 부인의 라디오에서 이런 뉴스가 흘러나온다. “후아레스 빈민촌에 신비한 산타가 나타나 장난감과 함께 그곳 주민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식량을 떨어뜨리고 갔다는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 깜짝 놀랄 크리스마스 소식에 비극적인 일이 합쳐졌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햄 깡통에 한 양치기 노인이 맞아 숨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남편은 이 뉴스에 덜컥 두려워져서 그제야 부인에게 사정한다. “당장 그 지붕에서 내려와, 타이니. 제발.”    

또 다른 수록작인 「여름날 가끔」은 인생이라는 아이러니를 더욱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이 사는 동네는 밤마다 거대한 제련소에서 연료를 태우는 곳이다. 엄청난 먹구름 같은 검은 연기가 하늘을 흐리면서 동네를 뒤덮고, 마을 사람들은 강한 유황 냄새에 목이 메어 캑캑거린다. 거리에는 누군가 던져서 깨뜨린 유리 조각들이 널려 있다.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이지만, 주인공과 친구들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카펫처럼 깔린 유리 조각들에 햇빛이 비스듬히 비쳐 반짝이는 것을 보고 황홀해한다. 동네 상공을 뒤덮으며 넘실대는 유황 연기가 역광을 받아 마치 북극의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색채를 내는 것 또한 즐긴다. 이 와중에 저열한 동네와 가난한 집이 싫어 일찍이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삼촌은 출신 지역의 암울함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부자가 돼서 돌아오고, 또 다른 삼촌은 아주 늦은 밤 주인공을 깨워 연기가 걷히고 유성이 쏟아지는 깨끗한 밤하늘을 발견하고 우울한 도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화가 복이 되고, 추함 속에도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이 소설집이 작가 루시아 벌린의 굴곡진 인생을 반영하는 것처럼, 어쩌면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리라. 그런데 이 소설집은 비단 인생이 아이러니함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인생의 복과 화, 추함과 아름다움은 마음가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다. 

가령 소설집의 첫 번째 수록작인 「벚꽃의 계절」에서는 아이를 키우느라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을 살며, 일하고 돌아온 남편의 “내가 싫어할 일은 하지 마”라는 짜증을 듣는 아내 카산드라가 나온다. 카산드라는 자신의 인생이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완벽하게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체부와 다를 것이 없다고,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카산드라는 지겨운 인생에 눈물까지 흘리지만, 곧 그의 인생에는 변화가 시작된다. 그가 지금까지 보지 않았던 세상을 의식적으로 돌아보면서부터.    

일상의 지겨움 속에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뭘 더 원하지? 하느님, 좋은 것만 보게 해주세요”라고 부르짖던 카산드라는 어느 날 틀에 박힌 상념에서 벗어나 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만발한 벚꽃을 발견하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만발한 벚꽃 주변에는 크리스탈의 영롱함을 보여주는 분수도 솟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날 이후로 카산드라는 지루하고 지긋지긋해 두통을 일으켰던 인생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벚꽃이 피었음을 깨달았듯, 의식적으로 마음가짐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생의 봄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것을 찾지 않아서였다. 그날 하루가 어땠느냐는 남편의 물음에 카산드라는 “아주 좋은 하루였어. 벚꽃이 만발하고 분수가 나오기 시작했어. 바야흐로 봄이야!”라고 대답한 뒤 “우체부가 분수 물에 젖었어”라고 부연하는데, 우체부가 물에 젖었다는 말은, 자신과 같이 늘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있던 우체부의 삶도 보는 눈을 달리하니 새롭게 느껴진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며 우리의 인생은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밤하늘을 보는 듯하다. 봄은 집안에 갇힌 채 지나가 버렸고, 이제 6월. 벌써 한해의 절반이 지나 버렸다. 우울한 기분. 그러나 어두운 밤하늘은 분명 먹먹하고 슬픈 두루마기 안에 빛나는 별을 품고 있다. 벌린의 소설은 이 순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 있지만 여기에는 빛나는 별도 있어. 그리고 우리는 밤하늘의 어두움이 아닌 별을 볼 수도 있어.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영화 <조커>의 OST가 흐르는듯하다. “That’s life. That’s what all people say. You’re riding high in April. You’re shot down in May. I know I’m gonna change that tune. When I’m back on top in June.”(그게 인생이야. 모두가 그렇게 이야기해. 4월에는 높이 올라갔다가, 5월에는 완전히 망해버리는 것. 하지만 난 내가 이 흐름을 바꿀 것을 알아.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갈 6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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