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사는 그책] ‘언컨택트’ 미래의 스케치… 공존현실, 드라이브 스루 장례식
[니가 사는 그책] ‘언컨택트’ 미래의 스케치… 공존현실, 드라이브 스루 장례식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6.03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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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다(buy)는 말에 어쩐지 산다(live)는 말이 떠오른다.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책을 사면서 그 책에 들어가 살 준비를 하는 건 아닐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 존 버거가 “이야기 한 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살아보는 게 된다”고 말했듯 말이다.
책을 산다는 행위가 그저 무언가를 구매하는 행위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그 구매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니가 사는 그책. 어느 가수의 유행가 제목을 닮은 이 기획은 최근 몇 주간 유행했던 책과 그 책을 사는 사람들을 더듬어본다. <편집자 주>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지난 4월 발행된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의 책 『언컨택트』가 입소문을 타고 서서히 인기가 상승하더니 5월 말에 결국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오타가 몇 개 보일 정도로 급하게 만든 책이지만, 오랜 시간 사회의 트렌드를 분석해온 저자답게 시의성 있는 풍부한 정보와 교양을 바탕으로 날카로운 통찰을 담아냈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전반에서 비접촉·비대면 기술과 문화(언컨택트)가 급속도로 진전될 것임을 전망하며, 독자에게 영화 <데몰리션 맨>이나 소설 『멋진 신세계』 등 SF 장르에나 등장할 법한 새로운 시대를 상상하게 한다. 책에 담긴 내용을 통해 가까운 미래 인간의 삶을 재구성해봤다.

#1

철수는 늘 집에서 일한다. 그런데 영희도, 정우도, 은채도 마찬가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집에서 일한다. 그런데 이들이 일하는 곳은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현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존현실(CR, Coexistent Reality: 영화 <메트릭스>처럼 사람들이 실제처럼 소통하고 교류하는 가장 진보한 가상현실). 철수는 실재계(實在界)와 아주 비슷한 이 가상의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협업하고 어울린다. 심지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카페도 간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까지 현실 세계에서와 동일하게 느낀다.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대중화, 보편화된 기술은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이었다. 이는 가짜만으로 이뤄진 공간이다. 이보다 진보한 기술이 진짜 공간과 가짜 공간이 결합해 공간을 확장하는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그리고 그보다 발전한 기술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혼합현실(MR, Mixed or Merged Reality)이었다. 그런데 코로나19라는 티핑포인트(어떠한 현상이 서서히 진행되다가 작은 요인으로 한순간 폭발하는 것)를 기점으로 언택트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고, 공존현실이 보편화한 것이다. 이제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지워진 확장된 공간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2

영희는 대학교 동기들을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다. 캠퍼스도 강의실도 없는 대학에 다니기 때문이다. 수업 자료를 온라인을 통해 미리 학습하고, 자체적인 온라인 강의 플랫폼을 통해 매일 저녁 교수님과 동기들과 함께 토론한다. 영희는 서울에 있지만 동기들은 베를린, 런던, 타이페이 등 다양한 곳에서 수업에 참여한다.      

코로나19는 기성 대학 시스템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2020년 상반기 우리나라 대학을 포함한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 컬럼비아대, 스탠퍼드대 등 미국 전역의 대학들이 수업을 온라인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발 빠른 대학들과 기업가들은 2014년 개교한 벤 넬슨의 ‘미네르바 스쿨’(온라인으로만 수업을 진행하는 대학, 하버드대보다 합격률이 낮다고 알려졌다) 시스템을 도입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대학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못한 대학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갔다.       

기성 대학의 몰락은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었다. 코로나19 이전에도 기성 대학의 가치는 줄곧 곤두박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지난 2018년 애플이 미국에서 고용한 직원의 절반이 4년제 학위가 없었는데, IT산업이 더욱더 주도권을 가지면서 기성 대학의 위상은 급속도로 땅에 떨어졌다. 명문대 졸업장이 성공의 보증수표가 아닌, 그저 입사를 위한 평가 도구로 전락했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은 살아가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시선이 팽배한 시점에서 코로나19가 기성 대학 몰락의 명분이 됐다. 일단 학교에 모이는 것은 전염병 감염의 위험이 있기에 강의실과 캠퍼스가 무용해졌다. 교육의 기회가 더욱 많은 이들에게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언택트(에듀테크) 기술의 발전은 사회가 그렇게 많은 대학을 필요로 하지 않게 했다.     

#3 

정우는 아주 오랜만에 바깥에 나왔다. 드라이브 스루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결혼식조차 공존현실에서 진행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륜지대사는 최소한의 접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차를 타고 밖으로 나온 정우는 도로에 자동차보다 자율주행 배송로봇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몇 년 전만 해도 일상에서 마주치던 택배 배송 기사, 음식 배달원, 서빙하는 접객원, 가사도우미 등이 사라졌음을 새삼 깨닫는다. 2019년 1월 아마존이 자율주행 배송로봇을 시범 운용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기업이 자율주행 배송로봇을 만들기 시작했고, 삼성전자, LG전자에서는 서빙뿐 아니라 손님 접객과 조리까지 하는 다이닝 로봇을 개발했다. 이러한 흐름이 코로나19 이후 경쟁적으로 커져서 세상이 뒤바뀐 것이다. 

결혼식장에 도착하니 신랑 신부가 의자에 앉아 있고, 하객이 자동차를 타고 그 앞을 지나가며 축의금을 내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신랑과 신부가 음식이 담긴 봉투를 차에 넣어주고, 악수나 포옹 등 일체의 신체 접촉은 없다. 정우는 몇 달 전에 참여했던 드라이브 스루 장례식이 떠오른다. 정우는 그날 차에 탄 채로 접수대에 가서 창문을 내리고 태블릿PC의 방명록을 적은 뒤 불붙인 향처럼 생긴 전열식 향을 건넸다. 그리고 접수대 뒤의 창문으로 빈소를 보며 조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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