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母性) 신화’ 이제 그만… “오롯한 나로 살래요!”
‘모성(母性) 신화’ 이제 그만… “오롯한 나로 살래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5.27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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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철 감독, 영화 <말아톤>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2005)은 감동적인 영화다. 자폐증에 걸린 아들 초원(조승우)을 마라토너로 만든 어머니 경숙(김미숙)의 피나는 노력에 많은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마냥 박수를 보내기에는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스크린 바깥, 초원과 같은 자폐증 자녀를 둔 어머니들의 한숨이 그것인데 “초원이는 자폐아라도 저렇게 잘 성장하는데 네 아들은?”이라는 주변인들의 반응이 압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문제점은 바로 ‘모성 신화’다. <말아톤>에서 경숙은 아들 초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엄마들은 자폐증을 겪는 아들마저도 훌륭한 마라토너로 성공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소명을 떠안는다. 이를 위해 경숙의 소중한 시간은 오롯이 아들의 성공을 위해 바쳐진다. 여기에 경숙 ‘자신만의 삶’은 없다. “애는 엄마가 돌봐야지”라는 말에 내재한 모성 신화. “애가 이렇게 될 동안 당신은 뭐했어?”라는 아버지의 무심한 언어폭력. 스크린 안에서 펼쳐지는 모성 신화가 스크린 바깥의 엄마들을 옥죈다.

SBS 드라마 ‘엄마가 바람났다’ 공식 홈페이지

최근 SBS 아침 드라마 ‘엄마가 바람났다’의 기획 의도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인공인 돌싱맘 오필정(현쥬니)은 멋지고 돈 많은 아빠를 원하는 자식들을 위해 재혼을 고민한다. 이 드라마에서 필정은 ‘인간’이기 전에 ‘엄마’로 위치 지어진다. 필정은 자식들이 원하는 아빠를 만들어주기 위해 ‘원치 않는’ 맞선을 줄기차게 본다. 이 드라마의 기획 의도는 “세상의 전부인 자식들한테 부자 아빠를 만들어주기 위한 오필정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헛바람 꿈은 이뤄질까?”라는 물음을 덧붙이며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한창 방영 중인 이 드라마가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끝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하지만 기획 의도만 놓고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왜 감독은 결혼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는 돌싱맘을 ‘굳이’ 재혼시켜 아이들에게 돈 많은 아버지를 만들어 주려는 걸까. ‘가부장제로의 회귀’라는 너무도 낡고 진부한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정녕 기자뿐일까?

최근 서점가에는 엄마들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담은 책들이 눈길을 끈다. 책 『결혼 뒤에 오는 것들』의 저자 영주는 “시부모에게 ‘며느리를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선언했고, 딸·아들에게 ‘엄마 역할을 졸업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로소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문이 열렸다”며 “변화된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남편과 딸·아들, 시부모도 모두 자신으로 살아갈 힘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이어 “이제는 며느리·아내·엄마라는 역할보다 나 자신으로 먼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내가 나를 지키고 존중할 때, 상대도 그만큼 나를 대우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책 『엄마가 되었지만, 저도 소중합니다』의 저자 꽃개미는 “‘나를 지키며 사는 것’이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다”며 “나는 앞으로도 나다운 모습으로 아이와 재미있게 지내려고 한다. 내가 ‘나’인 동시에 ‘엄마’인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저자만의 방법을 책에 담았다.

나이가 든 뒤부터 나는 모든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냈다. 남편과도 마찬가지였다. 딱 달라붙어 지내는 두 사람이 순수하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될까. 오래두고 보려면 사랑에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 진정 사랑하는 관계라면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책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中

책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의 저자 이현미 역시 이 세상 엄마들에게 ‘오롯한 나’로 살 것을 주문한다. 그는 “답답함이 풀린 건 ‘모성 이데올로기’에 대해 알아 가면서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모성 신화가 내면에 가득함을 깨달았다”며 “세 살까지 엄마가 아이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한다는 ‘3세 신화’부터 아이의 발달을 전부 엄마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 분위기에 나 역시 젖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여성을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로 규정짓는 게 아닌, 삶의 단독자이자 한 인간으로서 존립하게 하는 것. 그렇게 조금씩 사회의 제도와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이 땅의 엄마들을 위한 우리의 첫 번째 배려가 아닐까. 엄마의 진짜 이름은 엄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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