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해자의 서사’를 알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해자의 서사’를 알고 싶지 않습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5.26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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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착취물을 공유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인 'n번방' 운영자로 경찰에 구속된 '갓갓' 문형욱 [사진=연합뉴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최근 성범죄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서 가장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은 바로 ‘가해자 서사’이다. 특히 ‘n번방 사건’과 관련해 일부 언론들이 보도한 기사의 제목을 보면, 성범죄자들이 한때는 착하고 순수했으며 심지어 공부도 웬만큼 했다는 것을 ‘굳이’ 강조한다. 그 보도들에는 도대체 어떤 저의(底意)가 있는 걸까?

<‘갓갓’ 문형욱 소속 대학도 ‘발칵’… 현실선 “중위권 성적의 아싸”> <대학생 ‘갓갓’의 두 얼굴…‘내성적이고 평범한 건축학도’> <대학생 ‘갓갓’ 두 얼굴… 동문들 “일상에선 내성적… 소름끼쳐” - 착실하다는 평가, 논문·과제도 성실히 제출> <“반항 한 번 없던 아이, '갓갓' 믿기지 않는다”>

경찰이 지난 13일 텔레그램 n번방의 최초 개설자로 알려진 ‘갓갓’ 문형욱씨의 신상을 공개한 직후 쏟아진 기사의 제목들이다. 온라인상에서 성을 매개로 여성들에게 언어적·심리적 폭력을 서슴지 않았던 문씨의 지극히 평범했던 나날들이 위와 같은 제목의 기사들로 자세히 보도됐다.

문씨가 ‘중위권 성적’의 소유자임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성적이 높은 사람은 범죄자가 될 확률이 적다는 걸 은연중에 내포한 ‘성적만능주의’는 아닐까. 내성적인 성격을 굳이 밝히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내성적인 사람에 비해 외향적인 사람이 범죄자가 될 확률이 크다는 편견을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논문과 과제를 성실히 제출한 범죄자에게는 면죄부라도 주란 말인가. 어릴 적 반항 한 번 없던 아이도 타인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이에 대해 한 누리꾼은 “언론이 자꾸 범죄자 관련 보도에서 ‘평범했다’는 말을 습관처럼 쓰는데, 저런 범죄자에게 ‘평범’이라는 말은 애초에 안 맞다”며 “이미 평범하지 않은 게 밝혀진 파렴치한 인간에게 ‘평범’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식의 보도는 대중들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시 말해 언론이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가 아닌 일상적인 ‘과거’를 과도하게 중계함으로써 범죄 행위의 본질을 흐린다는 것이다.

지난 16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이다혜 작가는 “(가해자의) 장래희망이 뭐였고, 그래서 ‘장래에 뭐가 되고 싶었는데…’라는 식으로 보도를 한다든가 (중략) N번방 사건과 관련해서는 (가해자가) 굉장히 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식의 보도가 많다”며 “(가해자를) 이렇게 착하고 보통 사람, 순진한 사람,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이게 마치 한순간의 실수로 인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를 꼬집었다.

이처럼 가해자의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보도는 사건 자체의 본질, 그러니까 피해자의 고통을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어내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는 2008년에 8세 여아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조두순 사건’을 언론이 한동안 ‘나영이 사건’으로 부른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가해자의 과거를 나열하는 식의 보도와 사건의 이름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아동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 모두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끼칠 수 있다. 두 사례는 모두 언론인의 ‘성인지 감수성’(성별 차이로 인한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해내는 민감성)의 부재로부터 기인한다.

한국기자협회가 제안한 성폭력 사건에 관한 보도 기준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가 인격을 침해당한 심각한 인권침해의 문제이며 그 원인이 잘못된 성 인식과 성차별적 문화 등 사회문화적 구조에 있다. 이에 따라 ▲피해자 보호 ▲선정적, 자극적 보도 지양 ▲신중한 보도 ▲성폭력 예방 및 구조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지침으로 제시했다.

논문 「미투 운동 이후의 언론계 성인지 감수성 고찰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성범죄 보도」의 저자 장윤미는 “성인지 감수성, 이 원칙이 언론의 성폭력 관련 보도 과정에서 훼손될 경우 성폭력 피해자는 더 큰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성인지 감수성은 언론에게 단순히 권고하고 넘어갈 원칙이 아닌 강제할 원칙”이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언론감시기관의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모니터링 강화와 이 모니터링 결과를 토대로 부적절한 보도를 한 언론에 대한 실질적인 규제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성범죄와 관련한 보도는 일차적으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또한 성범죄의 원인과는 무관한 가해자의 서사는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줄뿐만 아니라 사건의 근본 원인을 밝히고, 성폭력 예방 및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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