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2017년 겨울에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1987>은 박종철 열사에서 시작해 이한열 열사로 끝나는 1987년의 한 국면을 보여주지만, 서사 이면에는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시작해 1987년 6월의 서울시청 광장으로 마무리되는 제5공화국의 시간이 있다. 영화 속에서 만화 동아리를 통해 은밀하게 상영되는 ‘광주사태’ 비디오는 이를 본 사람들에게 충격과 죄책감, 그리고 일종의 소명의식을 남겼다. 이 비디오를 보던 연희(김태리 분)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장면에 흐느끼다 더 이상 보기를 거부한 채 뛰쳐나오지만, 결국 선배 이한열(강동원 분)의 죽음을 계기로 거리에 나선다.<462쪽>
<1987>보다 몇 달 앞서 개봉한 <택시운전사>는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다. (중략) 특히 5·18을 재현했던 초기의 영화나 소설들은 ‘최후의 날’에 도청에 있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들은 광주에 고립된 채 정박해 있거나, 몸은 빠져나왔으나 영혼은 여전히 광주에 맴돌고 있는 인물들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광주에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 이상의 선택은 없었다. 반면 <택시운전사>는 만섭이 광주로 다시 돌아가는 순간을 다룬다. (중략) 영화가 시종일관 만섭의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관객 역시 만섭에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만섭의 방향 선회는 관객의 방향 선회이자 각성을 요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465쪽>
반면 기존에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던 항쟁 주체들을 조명한 작품도 있다. <김군>은 ‘시민군’으로 통칭되던 기동타격대를 본격적으로 조명했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항쟁의 뒤쪽에 물러나 있던 여성들을 스크린 전면에 내세웠다. 이 두 영화는 그동안 시각적 재현장에서 ‘남성’화된 ‘시민’계급으로 상정된 저항 주체들 내부의 상이한 젠더와 계급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472쪽>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이야기들의 변천을 말하며, 정근식은 시의 시대, 노래의 시대, 소설의 시대, 사진의 시대로 변화해왔다고 말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안혜련은 1980년대 5·18에 관한 이야기는 시의 시대에서 소설의 시대로 옮겨왔다고 지적한다. 직접적 재현이 불가능한 시대에 시나 노래의 울림이 있었다면, 소설과 사진의 시대는 그것을 재현할 언어를 찾기 위한 과정이었다. 영화의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1990년대에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들이 등장했지만, 정작 이 영화들은 광주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흩어진 파편들을 찾아 헤매었다. 그것은 또한 ‘광주 비디오’의 생생한 시각적 충격을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윤리적 언어를 찾는 과정이었다. 최근 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기존의 영화적 관습을 답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5·18민주화운동을 재현하는 데 있어 선명한 언어들을 구사하며 새로운 변화들을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억눌렸던 부채의 무게를 딛고 정말로 광주에 대해서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언제나 진실이고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재현의 층위는 여전히 다양하고 모순적이고 충돌을 거듭한다. 하지만 수많은 층위의 충돌과 부침 속에서 1980년 5월의 광주는 현재의 기억 장 안에서 한층 의미를 더해갈 수 있을 것이다.<479~480쪽>
『무한텍스트로서의 5·18』
김형중·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펴냄│560쪽│2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