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을 위한 변론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을 위한 변론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5.15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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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현 감독, 영화 <사냥의 시간>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윤성현의 영화 <사냥의 시간>에 관한 반응이 뜨겁다. 그 반응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다소 허술한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이미지로 극을 힘차게 밀고 나간다”는 의견과 “디스토피아(dystopia)의 핏빛 이미지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허술한 내러티브를 타개할 정도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의견의 대립. 대체로 관객들의 평가는 후자에 가까운데,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는 조롱에 가까운 비판들이 이를 방증한다.

<사냥의 시간>은 암울한 근미래(近未來)를 배경으로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청년들이 도박장을 털다가 정체불명의 추격자로부터 쫓기는 영화다. 관객들이 영화에 가한 비판 중 하나는 주지하다시피 “내러티브가 허술하다”는 것. 확실히 ‘쫓고, 쫓긴다는’ 간명한 메인플롯에 비해 그 주변을 수놓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엉성한 서브플롯이 극의 흐름을 불균질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를 가지고 영화 전체의 만듦새를 깎아내리는 듯한 비난은 온당치 않다.

생각해보면 윤성현의 영화는 언제나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는 인과법칙을 비켜갔다. 그의 첫 단편 <아이들>(2008)이 그랬고, 첫 장편 <파수꾼>(2011)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영화 모두 인물들의 심리를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으며 무수한 결과의 나열로써 내러티브를 추동한 측면이 있다. 그것을 <아이들>은 점프 커트(jump cut : 연속성을 깨뜨리는 급격한 장면 전환)로, <파수꾼>은 핸드헬드 카메라에 의한 아웃 포커스(out focus : 일부러 초점을 맞추지 않고 흐릿하게 나타나도록 촬영하는 기법)로 더욱 강조했다.

윤성현 감독, 영화 <파수꾼> 스틸컷

“그냥 보통은 내가 다 얘기하잖아. 어? 근데 이번엔 그냥 자세하게 얘기 안 해도 그냥 넘어가. 설명 못하는 것도 있잖아.” 영화 <파수꾼> 中

이처럼 부재하는 원인과 실재하는 결과로써의 내러티브는 <파수꾼>의 의도된 작법이었다. 그러니까 윤성현이 구사했던 대부분의 영화 언어들은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정황’이 전무함을 은유한다. 달리 말하면 인물들의 행위를 비롯한 내러티브의 구조 자체가 처음부터 관객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게 조각돼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냥의 시간> 역시 비슷하다. 영화는 정교한 내러티브로 극을 밀고 나간다기보다 시대의 불안한 상황과 인물의 위태로운 심리를 동력 삼아 극적 긴장을 유지한다. 즉 이 영화를 바라보는 가장 합당한 시선은 내러티브의 인과율이 아니라 어두운 시대와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들이 발산하는 이미지의 활력과 생기에 초점이 모여야 한다.

낡은 구분법이긴 하지만 굳이 영화 스타일로 분류하자면 <사냥의 시간>은 표현주의 영화에 가깝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내러티브와 그것을 이루는 소재들은 이미지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도로 조작되고 양식화된다. 이에 따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터무니없는 인물과 사건들의 무질서한 연쇄는 <사냥의 시간>이 갖고 있는 고유한 영화적 리듬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냥의 시간>의 가장 압도적인 소구(訴求)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준석(이제훈)과 한(박해수)의 첫 대면 장면과 그 뒤로 이어지는 지하 주차장, 병원, 폐공장에서의 이미지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특히 지하 주차장 장면에서 감독은 쫓기는 자(준석)와 쫓는 자(한)의 ‘진짜 대결’을 한 차례 유예하면서 극적 긴장을 증폭하는데,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강렬한 콘트라스트(contrast : 명암 대비)로 발현하는 순간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에서 최초 공개됐다는 점이다. 이미지의 힘이 뛰어난 영화일수록 극장에서의 체험이 중요한데, 넷플릭스 상영으로 영화의 본연적 재미가 크게 반감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의 시간>은 장르적으로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며 윤성현이 보여준 일련의 영화적 시도들은 천편일률적인 기획·상업 영화가 판치는 충무로에 유의미한 파장을 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사냥의 시간>은 단연 올해의 화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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