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예를 들어,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침대 옆 탁자에서 나를 기다리는 맛있는 커피 한 잔을 볼 수 있다. 한 걸음 떨어져 있으며 내가 그것을 만지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그 자신을 나에게 드러내고 있다. 내가 그것을 본다(see)는 것이 어떻게 일어날까? 어떻게 시각 체계는 커피 한 잔의 이미지를 나의 인식이나 마음에 전달할까? 대답은 별로 간단하지가 않다. 매우 대략적인 물리적 이야기는 이렇다. 커피 잔에서 온 빛이 내 눈에 들어가고, 이 빛이 양 눈 뒤쪽에 있는 두 망막에 충돌한다. 그 다음은 생리학에서 배운 대로 두 망막이 전송하는 전기 신호가 시신경을 따라 내려가 시신경교차를 통과한다. 이 신호들은 뇌의 뒤쪽에 있는 소위 시각피질로 전달된다. 그런 다음 일종의 기적이 있다. 시각피질이 활성화되며, 나는 커피 잔을 본다(see). 심지어 내가 컵을 의식하고 있다(conscious)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내가 컵을 본다(see)는 말과 어떻게 다른지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말이다.<21쪽>
게다가 마음의 뇌라는 주장은 또한 뇌는 마음이라는 주장과 동등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논리학자와 수학자들은 동일성을 ‘교환적’(commutative)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만약 a=b라면 분명히 b=a이다. 그러나 뇌가 정말로 실제로는 마음이라는 주장은 완고한 중추-상태 유물론자에게 호소되길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물론(모든 것은 물질이다)보다 관념론(모든 것은 마음이다)을 더 시사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83쪽>
옳다. 사유가 연장으로 환원될 수 없음은 빨갱이 장파장 빛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분홍이 연한 빨강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분홍이 연한 장파장 빛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는, 빨강 색을 지닌 모든 것은 그것의 현상적 측면에서는 빨강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그것의 물리적 측면에서는 장파장 빛을 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려면, 우리는 두 측면들 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준비돼 있어야만 할 것이다. 빨강은 어째서 특별히 장파장의 빛과 제휴해야만 하는가? 무엇이 연결 고리인가? 이중 측면론은 어떤 설명도 없이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심-신 문제를 재생산할 뿐이다. 범심론도 마찬가지다.<184~185쪽>
『마음과 몸의 문제』
조너선 웨스트팔 지음│한정라 옮김│한울엠플러스 펴냄│240쪽│2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