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광복은 독립운동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일까? 아니면 일제 패망에 따른 산물일 뿐일까? 독립운동으로 광복을 이뤘다고 하기엔 힘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고, 일제 패망으로 얻은 것이라면 독립운동의 가치가 퇴색된다. 그럼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 아닌 '제국주의를 퇴치하는 평화운동'의 관점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 본질적 가치 안에서는 이견을 찾기 어렵지 않을까? 의병운동부터 8·15 광복 전후까지 독립운동의 전 과정을 담아내 '독립운동이 무엇을 이뤄냈나'라는 생각거리를 던지는 책이다.
의병운동이 1906년 이후 3~4년 동안 전국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이를 근절하기 위해 조선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지휘하는 군대를 증가시켰다. 아울러 일제는 1908년 6월에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을 공포해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모집했는데 그 수가 4,065명에 달했다. 이들은 의병 토벌과 정보 탐색에 이용됐다. 일제는 전국에 493개소에 분견소를 두고 한국의 군사경찰·행정경찰·사법경찰까지 장악했다. 여기에 10만명의 친일파 일진회원들이 가세해 의병운동을 방해했고, 일제도 그들의 탐정 활동에 크게 의지했다. <94쪽>
신문 발간도 계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먼저 양홍묵·이승만 등의 주도로 1898년 1월 최초의 순 한글 일간지 <매일신문>이 창간됐다. 그해 8월에는 이종일이 한글 전용을 고수한 <제국신문>을 , 9월에는 남궁억이 <황성신문>을 창간했다. <황성신문>은 국한문혼용이어서 중류 계층 이상의 독자들이 많이 찾았다. <황성신문>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일제로부터 정간을 당하기도 했지만, 민족의식 고취와 대일 비판의 자세를 고수했다. <102쪽>
조선인을 전쟁의 총알받이와 짐꾼으로 쓰기 위한 강제동원정책도 추진됐다. 1938년 2월 일본 내각은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한 후 군대식 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나남·함흥·평양·대구 등지에 훈련소를 설치했다. 1943년 7월 '핸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고, 같은 해 10월에는 전문학교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학병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만3,000여명이 '학도지원병' 명목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전문학교와 고등학교 한인 재학생으로 학병에 지원하지 않은 적령자나 졸업생에게는 징용 영장을 발급했다. <191쪽>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각지 부인회들이 1919년 8월 다뉴바에 모여 대회를 열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로부터 인준을 받아 '대한여자애국단'을 조직했다. (중략)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인국민회와 협력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 동포 구제 사업에 목적을 뒀다. 재정은 단원 연회비 3달러씩을 몰아 경상경비로 쓰고, 사업경비는 특별회비를 각출해 썼다. 단원은 가장 많을 때 150여명 정도였다. <232쪽>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 장석흥 외 17명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424쪽│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