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빈 프레임’에 놀아난 대중과 언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주빈 프레임’에 놀아난 대중과 언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3.26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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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착취 불법 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한 혐의를 받는 조주빈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생각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히 코끼리가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인지언어학의 창시자 조지 레이코프는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반대로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 여기서 ‘코끼리’가 바로 화자가 의도한 프레임이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과거 미국 정치판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어느 순간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세금’이라는 단어 뒤에 ‘구제’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세금이 괴롭힘의 대상이라고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세금은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일 수도 있고, ‘사회로부터 받은 빚을 갚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세금 구제’라는 단어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보수 정치인이 이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진보 정치인들도, 그리고 일반 대중도 이 단어를 따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일반 대중은 세금을 올리자는 주장에 거부감을 표하게 됐고, 진보 정치인들은 세금을 올리자는 논리를 설득하기 어려워졌다. 보수 진영이 만든 ‘프레임’(생각의 틀)이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해버린 것이다.  

“손석희 사장님, 윤장현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25일 ‘n번방 사건’ 가해자 조주빈 발언)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주빈이 경찰서를 나서며 당당하게 준비한 발언을 쏟아냈다. 경찰서 앞에서 피해자들에게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전혀 뜬금없는 이들의 이름을 댄 것이다. 

이 발언에 대중의 시선은 너무나도 쉽게 돌아갔다. 조주빈이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자, 조주빈에서 시선을 돌려 ‘손석희’로 향했다. 조주빈이 해당 발언을 하기 전까지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조주빈’이었으나 해당 발언 이후 ‘손석희’로 바뀌었고 ‘n번방 사건’은 검색어 순위 10위권에서도 사라졌다. 심지어 대중은 그의 혐의보다 그가 목에 차고 나온 깁스에 주목했다. 이 역시 주도면밀한 조주빈의 프레임이었을까.  

대중이 먼저인지, 언론이 먼저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언론 역시 조주빈이 제시한 프레임에 부화뇌동(附和雷同)했다. 기사 조회 수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가오는 총선을 위해 조주빈의 프레임을 이용한 것일까. 기자들은 기사 제목의 중심을 ‘조주빈’에서 ‘손석희’로 바꿨다. 소위 ‘메이저’라고 불리는 일부 주요 일간지들도 26일 아침 1면에 손석희의 이름을 조주빈보다 크게 썼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손석희 사장님, 윤장현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경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중에 화자가 의도하는 프레임이 담겨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의 도덕적 관점에 입각해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는 “매일매일 모든 쟁점에 대해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조주빈의 입에서 나온 몇 마디에 들썩였던 대한민국.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 할 코끼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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