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가 공포를 잠식하다... 코로나 19보다 더 무서운 ‘이것’
공포가 공포를 잠식하다... 코로나 19보다 더 무서운 ‘이것’
  • 서믿음 기자
  • 승인 2020.03.12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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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감시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느 순간에 감시를 당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언제든지 도청당할 수 있고 언제든지 감시당할 수 있다고 간주하며 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72년 전(1948년) 발표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속 배경은 국민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빅브라더’(정보 독점을 통한 사회 통제) 사회다. ‘텔레스크린’(감시 기구)을 통해 국가가 강압적으로 국민을 통제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찰나에 자신의 삶이 공유되고, 한순간에 통제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내용은 독자를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 공포 일부는 현실이 됐다.

최근 2개월간 코로나19로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대중은 감염의 공포에 질겁했고, 그 공포는 더 무서운 ‘감시 공포’를 동반했다. 정부는 추가 감염 예방이란 명목으로 확진자의 성별, 나이, 거주지, 동선을 공개하기 시작했고, 확진자의 삶은 그렇게 만천하에 공개됐다. 국민 대다수가 소지한 휴대폰과 신용(체크)카드, 거리 곳곳에 설치된 CCTV는 『1984』 속 텔레스크린을 대체했고, 어디 사는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뭘 먹고, 뭘 했는지가 ‘확진자’라는 낙인과 함께 개인을 옭아맸다.

[사진=질병관리본부 코로나 홈페이지]
[사진=질병관리본부 코로나 홈페이지]

질병관리본부(질본)는 확진자의 성별과 나이, 거주지, 이동 경로 등 나름 제한된 정보를 공개했지만, 지역사회 내에서 해당 정보로 확진자를 특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확진자의 성(姓)과 세밀한 거주 정보(아파트 단지명)까지 공개해 낙인의 깊이를 더했다.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염병 보균자로 낙인찍힌 확진자들은 이웃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해야 했고, 일부는 “코로나로 인한 죽음의 공포보다 밀어내는 시선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연구팀이 지난 4일 발표한 설문조사(한국리서치에 의뢰, 1,000명 대상)에 따르면 상황별 두려움(5점 만점)을 묻는 항목에서 ‘확진자가 됐을 때 받을 비난이나 추가 피해’가 3.52점으로 높게 파악됐다. 이는 ‘무증상 감염’(3.17점)이나 ‘주변에 확진자가 있는 것’(3.1점)보다 높은 수치다. 결국 코로나19에 의한 1차 피해보다 2차 피해가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2차 피해 중에는 도덕성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공개된 동선을 보고 특정 확진자를 불륜남(녀)이나 윤락녀(남)로 지목한 것이다. 어느 확진자는 부인과 자녀는 음성, 처제만 양성 판정을 받아 처제와의 불륜 관계를 의심받았고, 또 다른 확진자는 특정 시간대에 노래방을 수차례 방문해 ‘노래방 도우미’라는 의심을 받았다. 일부 불륜 정황과 관련해서는 이번 기회에 발각돼 다행이라는 여론도 있지만,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기에 2차 피해의 우려가 상존하는 상황이다.

순식간에 삶이 공개된 확진자들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개인정보 공개는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공개되는 터라 개인정보보호법을 적용받지 못한다. 2차 피해를 당해도 다수의 안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에 지난 9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성명서를 내고 “필요 이상의 사생활 정보가 구체적으로 공개되면서 확진자의 내밀한 사생활이 노출되는 인권침해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며 개인을 특정하지 않고 시간대별로 방문 장소만 공개하는 방식을 권면했고, 질본 측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응답했다. 다만 아직 뚜렷한 변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감시의 명분이 되고, 그로 인해 누군가는 감시의 공포와 마주한 상황. 항간에는 이번 사태로 불륜과 윤락업소 출입이 줄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는데, 과연 우리네 삶은 지금 공개돼도 문제가 될 것 없는 깨끗한 삶인지 찬찬히 되돌아볼 문제다. 또 공개될수록 ‘미담’(美談)이 나오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의심 섞인 비난을 쏟아내는 것이 타당한 처사인지도 생각해볼 과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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