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자랍니다”
[인터뷰]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자랍니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3.0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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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재우 기자]

생텍쥐페리는 소설 『어린 왕자』의 서문에서 절친한 친구였던 레옹 베르트에게 이 책을 바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른들 모두 처음에는 어린이였다. 그러나 대부분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생텍쥐페리의 말을 빌려서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를 표현한다면, 그녀는 자신이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그 기억과 기록을 지금의 어린이들과 함께 나누려는 사람이다. 그 ‘나눔’의 소리는 맑고 경쾌하며 또랑또랑하다.

기자의 눈을 바라보며 시종 해맑은 표정으로 책과 어린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도록 잊기 힘들 것 같다. 그녀가 최근 번역한 책 『왕자와 드레스메이커』의 인기가 만남의 좋은 계기가 됐다. <독서신문> 사옥에서 만난 그녀와의 따뜻했던 대화를 공개한다.

[사진=오재우 기자]

Q. 최근 번역을 맡은 젠 왕의 『왕자와 드레스메이커』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만화상의 하나인 ‘아이스너 상’(Eisner Award)을 수상하는 등 인기다. 국내에서도 화제인데, 소감이 궁금하다

A. 출판사를 통해서 책을 처음 보게 됐어요. 당시 젠 왕에 대해서도 좀 흥미가 있었고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 문학적 구성과 특성을 지닌 작가주의 만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책을 읽어보고 너무 좋아서 출판사 측에 꼭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웃음) 좋은 기회였죠.

Q.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드레스를 즐겨 입는 왕자 ‘세바스찬’과 천재적인 드레스메이커 ‘프랜시스’의 성장과 우정을 그린 이야기다. 특히 ‘젠더(gender)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처음 읽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A. 고전적인 ‘왕자-공주’ 서사가 굉장히 가부장적인 구조 안에 놓여있고, 이것은 특히 남성 어린이의 성장 서사잖아요? 왕자가 ‘왕위’라는 가부장적 권력을 취득하기 위해 모험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데, 그 과정에서 소위 “네가 저 괴물을 물리치면 아름다운 공주를 얻을 수 있다”라는 관습이 끼어들어요. 공주는 여기서 취득 당하는 ‘아이템’에 가깝죠.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남자와 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죠.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에 민감하신 분들도 아동 서사로 가면 이상하게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최근에 단순히 왕자와 공주의 자리를 미러링(mirroring)하듯이 바꾸는 책들이 나오고 있는데 말하자면 전략적인, 의도가 보이는 책들이에요. 이야기 자체로는 그렇게 재미가 없단 말이죠. 근데 이 책은 고전적인 ‘왕자-공주’의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현대의 감수성에 맞게 재구성됐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특히 공주 자리를 대체하는 프랜시스라는 여성이 ‘왕자’이자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세바스찬의 삶을 격려하고, 동시에 자신의 삶을 위해 도전하는 여성으로 나오는데, 서사 구조가 정말 절묘한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번역했어요.

Q. 드레스를 입은 세바스찬에게 “당신보다도 더 당신 같았어요”라는 프랜시스의 말과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어른인 세바스찬의 비서 에밀의 태도가 특히 큰 울림을 준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름’을 존중할 줄 아는 저자의 건강한 사고방식을 느낄 수 있었다

A. 그래픽 노블의 경우 말풍선 안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 들어가야 해요. 그래서 소설보다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말하자면 대사 하나가 독자를 강력하게 사로잡아야 하는데, 『왕자와 드레스메이커』에서 젠 왕이 쓴 대사들이 전부 좋았어요. 번역할 때 원작의 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어떻게 이 마음 그대로 전달할지 많이 고심하면서 작업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리고 제가 아이들에게 성 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 : 일상생활 속에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에 관해 얘기할 때, ‘상대의 영역 존중해주기’라는 말을 꼭 해줘요.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가깝게 지내는 게 참 좋은 일이지만, 상대의 영역을 서로 존중해야만 진정한 친구 관계로 발전할 수 있어요. 친구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묻지 않고 그 자체를 존중해줘야 한다는 걸 어려서부터 배워야 해요.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서로 간에 따뜻한 존중의 거리를 갖고 있어서 참 좋아요.

때때로 우리는 일반의 논리로 규정되지 않는,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배제되고 격리될까 봐 두려워서 그런 생각을 잘 표출하지 않죠. 그런데 이 책에는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꿈을 꾸더라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나는 그것을 존중해줄게’라는 태도가 있어요. 실제로 많은 인물이 그 태도를 지니고 있죠. 마지막엔 세바스찬의 아버지도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주잖아요? 그런 존중과 배려가 이 책의 주요한 메시지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Q. 서울예술대학교 교수로도 재직 중이지만 국내에선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정확하게 어떤 직업인가?

A. 아동청소년문학의 경우 어린이가 소비자이고 어른이 생산자인데, 어린이가 독자로서 느끼는 책에 대한 고민이나 소감 등이 책을 만드는 어른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반대로 생산자 역시 자신의 작품이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하기 어려울 때가 많죠.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소비자와 생산자가 소통하는 데 중간 장벽 같은 게 있는데,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는 그 거리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에요.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 책이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꾸준히 발견해주고, 생산자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반응을 해석하고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라고 생각해요. 특히 어린이 입장에서, 자신들이 이 작품을 통해서 어떤 걸 얻게 됐는지를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 재해석하고 도움을 받을 때,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글들이 후행(後行)적으로 도움을 줘요.

[사진=오재우 기자]

Q.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원래는 동화작가였던 셈인데, 본격적으로 평론을 공부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A. 동화작가로 데뷔를 했지만, 동화의 열혈 독자이기도 했어요. 제가 전공이 철학인데, 철학을 공부하면서 아동청소년문학만이 할 수 있는, 그러니까 아동청소년문학평론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어린이 독자가 작품을 읽으면서 어린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사회로부터 규정 받고 있는지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Q. 2016년에 발간된 아동청소년문학에 관한 평론집 『거짓말하는 어른』이 최근 3쇄를 찍었다. 책에서 “아동문학은 어른이 없는 사이의 어린이를 다룬 문학”이라고 말했는데, 풀어서 설명해준다면?

A.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자란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어른이 아이를 보호하거나 지켜줘야만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야 잘 자랄 수 있다고 믿어요. 그렇지만 누군가가 나를 완전하게 통제하거나 관리하는 상황 속에서는 성장할 수 없어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손을 놓는 사이를 틈타 자라거든요. 그 시간에 느낀 경이로움이나 자유가 아이들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복제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어른은 어떤 의미에서 어린이와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사람인 것 같아요. 어린이는 완전히 혼자라고 느끼는 순간에 비로소 성장하거든요. 어른이 무조건 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론 들키지 않는 자가 되는 것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실제로 어른들이 지켜보지 않아도 어린이가 그들만의 안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어른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성장했던 수많은 공간을 돌이켜보면 은밀한 장소들이었잖아요? 뭔가 재기 발랄한 생각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꿈꿨던 공간은 책상 밑이라든지, 다락방이라든지 아니면 모두가 다 밥을 먹으러 가고 어스름 저녁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던 놀이터라든지. 이런 공간이 다 어른으로부터 잠시 해방됐던 순간들이거든요. 그런 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아동청소년문학이라고 생각해요.

Q. 부모가 자식에게 ‘건강한 거리’를 둔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A. 그렇죠. 그런 점에서도 독서가 중요해요. 책을 많이 읽은 아이는 두려움이 줄어들고 용기가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세계의 경험을 그만큼 소유하는 거잖아요? 어른들이야 직접 경험할 수 있지만, 어린이는 안전의 문제 때문에 다양한 경험이 제한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에 할 수 있는 가장 풍부하고 다이내믹한 경험이 바로 독서죠.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책을 많이 읽고 있으면 좀 안심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아이가 어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많은 경우의 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좋은 책만 주어진다면, 그 책을 믿고 아이를 좀 더 떨어뜨려 놓고 양육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어떻게 다 말로 설명해줄 수가 있겠어요? 그 많은 세계의 일들을. 책 읽는 아이를 멀리서 지켜봐 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 중 하나예요.

Q. 아이들의 성장을 그린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2019)의 GV(관객과의 대화)를 맡는 등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보인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인상적이었던 영화가 있다면?

A.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신의 은총으로>(2020)라는 실화 바탕의 영화예요. 프랑스 리옹이라는 도시에서 아동성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들이 성인이 된 후 연대해서 자신들에게 성적 학대를 저지른 신부를 규탄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요. 다 큰 어른들이 어린 시절의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이라는 상황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영화의 내용처럼 살아가다 보면 어른이 된 내가 어린이였던 나를 구원해줄 기회가 찾아와요. 과거사를 규명하거나 범죄를 응징함으로써도 가능하지만, 어린이였던 나를 구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지금의 어린이를 구하는 일이에요. 이 영화가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어요.

GV를 진행했던 <우리집>도 정말 좋았어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윤가은 감독의 연출 태도나 이야기의 전개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있다는 데 있어요. 그 덕분에 배우들이 최상의 연기를 펼친 것 같아요. 어린이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은 어린이였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표정에 있어요. 어른이 지시하거나 만들어준 것 말고요. 영화를 잘 들여다보면 배우들이 진짜 자기의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들이 있어요. 이게 가능했던 요인 중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좋은 어른이 어린이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시스템이나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에요.

[사진=오재우 기자]

Q. 최근 ‘이상문학상 논란’이 뜨겁다.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현직 평론가로서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이번 논란에 관한 생각이 궁금하다

A. 우리 사회가 예술인들의 권리를 그만큼 존중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인 거죠. 예술가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데, 그 주장을 잘 못 받아들이는 사회라고 할까요? 이를테면 “네가 좋으니까 그 원고료 받고도 글 썼겠지”라는 말이 엄청난 폭력이라는 거예요. 좋아하는 게 죄인가요? 창작을 하는 예술인은 자신의 권리 보장받지 않아도 되나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그 안에는 나름의 힘듦이 있는데, 그걸 우리 사회가 잘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 동화 작가는 이 안에서도 소수자의 위치에 있어요. 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죠. 안타까운 일이에요. 동시에 저 자신도 내가 사랑했던 작가들의 권리나 처우 문제에 무관심한 독자였다는 점에 대해서 굉장히 반성하고 있어요.

Q. 청소년 독자들에게 특별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A. 엘리자베스 아체베도 작가의 『시인X』라는 소설이에요. 도미니카 출신의 가톨릭 가정에서 성장한 여성 이민자 청소년이 주인공이에요. 말하자면 이 책은 삶의 경계에 있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예요. 신체, 성별, 인종, 이민자, 종교 등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없었던 갖가지의 이유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주인공이 시를 쓰면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요. 그 과정에서 오는 잔잔한 울림이 있어요. 특히 청소년 독자들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A. 특별한 계획은 없고요. (웃음) 바람이 있다면, 책 읽는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많은 사람과 다양한 공간에서 함께 나누고 싶어요. 저는 창작자보다는 독자 입장에 더 많이 서 있는데, 다양한 연령의 경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책을 가지고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는 소규모의 공간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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