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응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랑을 ‘응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송석주 기자
  • 승인 2020.02.16 0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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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의 저택에 도착한다. 하지만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는 포즈 취하기를 거부한다. 이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화가도 부지기수. 답답한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마리안느를 산책 친구로 속이고, 그녀에게 자신의 딸을 몰래 지켜보면서 그릴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 감정은 끝내 각자의 마음을 횃불처럼 타오르게 만드는 간곡한 사랑의 파토스가 된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은 두 여인의 마음에 일었던 불길처럼 맹렬하고 눈부시다. 자연을 하나의 캐릭터로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델마와 루이스>(1993)가 떠오르기도 하고, 과도한 비탄의 정서를 걷어냈다는 점에서 <연애담>(2016)과 <윤희에게>(2019)가 생각나기도 한다. ‘바라보다’라는 상태가 중요한 만큼 인물 간의 시선을 유려하게 펼쳐낸 <캐롤>(2015)의 잔영이 비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황홀한 이유는 카메라의 시선이 ‘응시’(gaze)에서 ‘바라봄’(look)으로 전복되는 쾌감에 있다. 카자 실버만의 논의처럼, ‘응시’와 ‘바라봄’은 다르다. ‘바라봄’에는 상대를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주체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반면에 ‘응시’에는 상대에 대한 공격적인 관음이 내포돼 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응시’하며 완성한 첫 번째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말처럼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다. 마리안느가 예술의 기본적인 ‘규칙’과 ‘관습’, ‘이념’에 의한 것이라고 응수하지만 공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후 엘로이즈를 향한 마리안느의 시선이 ‘응시’에서 ‘바라봄’으로 전복될 때, 그러니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에 영화는 기존의 규칙과 관습, 이념을 거두고 새롭게 시작한다. 그 규칙과 관습, 이념이란 대개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이성애중심주의적 사고방식임은 물론이다. 이와 함께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다루는 연출도 인상적인데, 영화 초반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두 여인을 측면 클로즈업으로 포착한 장면이 그것이다.

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아녜스 바르다의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1955)의 인물 지형도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두 여인을 응시하는 카메라와 관객이 가진 ‘시선의 권력’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피사체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 카메라의 관음증적 시선을 소거하고, 언제나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관람의 형태로 세상과 인간을 응시하는 관객의 눈까지 ‘바라봄’으로 전환하는 감독의 연출은 지혜롭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처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그 누구도 절대적인 응시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 귀족인 엘로이즈와 화가인 마리안느는 물론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교감하고 소통하며 연대한다. 십자수를 놓는 소피와 와인을 따르는 마리안느, 요리하는 데 분주한 엘로이즈를 동시에 포착한 쓰리 숏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세 여인이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오르페우스가 신의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아내 에우리디케를 또 한 번 잃게 되는 대목에서,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고 맞받아친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핍진성과 궤를 같이한다. ‘당신이 나를 보면, 나도 당신을 본다’는 영화의 내적 논리 말이다.

영화는 마리안느의 시선과 비발디의 사계, 그 시선과 음악에 사로잡힌 엘로이즈의 얼굴로 끝을 맺는다. 근데, 그게 정말 이 영화의 끝일까?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나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라는 엘로이즈의 말을 떠올려보라. 그러니까 이 영화는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보기 전까지 끝났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의 내적 논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셀린 시아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포스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직부감 숏이 딱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낙태 수술을 받는 소피의 모습, 다른 하나는 마지막 밤을 보내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모습이다. 알렉산더 아스트뤽의 ‘카메라 만년필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두 장면은 영화가 세 여인에게 선물하는 초상화와 다름없다. 여인들의 육체를 실어 나르듯 가볍게 중계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치열하게 싸울 줄 아는 인간으로 곡진하게 아로새긴 초상화. 놀랍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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