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털 옷을 벗긴 남자
양털 옷을 벗긴 남자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20.01.1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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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중독은 때론 유익하다. 운동 중독 탓인지 매일이다시피 호수 둘레 길을 한바탕 뛰고 나면 심신이 깃털처럼 가볍다.

지난 며칠 전 일이다. 그날도 호수 둘레 길을 뛰다가 쉬기를 반복할 때다. 숨이 넘어갈 듯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인기척이 들려와 뒤돌아봤다. 육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보인다. 그도 지친 듯 내 곁에서 숨을 고르는 모습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재채기를 크게 한다. 이때 입안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그리곤 길 위로 ‘툭!’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그것이 하필 내가 서 있는 발치에 떨어졌다.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봤다. 다름 아닌 틀니 아닌가. 순간 곁의 그 남자는 내 앞에서 당황한 표정이다.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황급히 가린다. 나는 길바닥에 나뒹굴어진 틀니 한 짝을 주워서 얼른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재빨리 틀니를 받아들곤 이내 바람처럼 사라졌다. 어찌해 입안에 고정된 틀니가 밖으로 배출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추측건대 아마도 잇몸이 부실했나 보다. 그의 모습을 대하자 지난 학창 시절, 처음 내가 목격했던 틀니가 문득 생각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상급학교의 입학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친구 소개로 학교 앞 어느 분식집에서 일을 거들어 주기로 했다. 그곳에서 일할 때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마주치면 주방으로 얼른 몸을 숨기기 일쑤였다. 나중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열심히 일을 했다. 내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주로 카운터에서 손님들의 음식값을 받는 일이었다.

그 분식집 사장은 당시 오십 대 초반의 남자였다. 사장은 인심이 후한 사람이었다. 당시 고깃국보다 더 맛있었던 건 라면이다. 사장은 일하다 배고프면 종업원 한 사람당 두 봉지씩 라면을 끓여 먹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학비에 보태겠다는 일념으로 분식집에서 일하는 나를 항상 장하다고 칭찬하던 사장이다. 당시 독서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가끔 시집, 소설책 등을 사주기도 했다. 이때 사장이 사줘서 감명 깊게 읽었던 책들은 앙드레 지드 작 『좁은 문』, 샬롯 브론테 작 『제인 에어』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등의 소설책이다. 김광균 시인의 시 「설야」(雪夜)에 반해 일할 때도 이 시어들을 가만히 입속으로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이 문학책들은 오늘날 내가 글을 쓰는데 크게 필력의 밑바탕이 돼준 셈이다.    

분식집 사장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나이에 제화점(製靴店)에 들어가 기술을 익혔단다. 젊은 날엔 돈도 꽤 많이 벌어서 어엿한 소규모 제화공장도 차렸단다. 하지만 노름에 빠져 전 재산을 탕진했다고 했다. 나이 사십이 넘자 비로소 번쩍 제정신이 들어서 분식집을 차렸다고 했다.

어느 겨울,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손님이 없었다. 마침 사장 친구가 가게로 놀러 왔다. 날씨 탓인지 두 사람은 소주 한 병을 앞에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군대 이야기, 자신들의 젊은 날 여성 편력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더니 어느 한 쪽 주사(酒邪)가 불거져 나왔는가 보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급기야는 두 사람이 멱살잡이를 하더니 식당 문을 박차고 밖에까지 나가서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때 사장 입안에서 벌건 색을 띤 이상한 물체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길 위에 떨어지는 동시에 두 동강이 나버렸다. 깜짝 놀라 밖을 살펴보니 다름 아닌 틀니였다. 사장은 술김에 자신의 입안에 틀니가 빠진 줄도 모르고 친구와 여전히 몸싸움을 벌인다. “힘마. 네 강 내게 평소 감정이 있던 게 분명 향.” 틀니가 빠지자 발음이 어눌한 어투로 고함까지 지른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던 사장은 입안이 허전했던지 그제야 자신의 틀니가 빠진 사실을 알았나 보다. 그는 싸움을 멈추고 우리들 앞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입안의 틀니가 빠지자 합죽이로 변신한 사장이다. 그 모습과 말투가 왜 그리 우스운지 철없던 나는 식당 안으로 들어와 배를 잡고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서너 달 그곳에서 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머니께 그 사실을 들켜서 그곳을 부득이 그만뒀다. 다음해 고등학교를 입학 할 때다. 누군가 꽃다발을 전해달라고 한다며 교문 앞 꽃 파는 상인이 한 묶음의 꽃다발과 흰 봉투를 나에게 건넨다. 그 안을 살펴보니 입학을 축하한다는 편지 내용과 상당한 금액의 지폐가 들어있었다. 다름 아닌 분식집 사장이 나의 입학식을 어찌 알고 꽃다발과 입학금에 보태라고 돈을 보낸 것이다.

추억은 때론 가슴을 웃기기도 하고 눈물짓게도 한다. 겨울철 흰 눈이라도 내리는 날에는 분식집 사장의 틀니 빠진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지난 시간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꿈을 선사한 분식집 사장 아닌가. 그를 떠올리노라면 이즈막도 겨울철 양털 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휩싸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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