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밀리언셀러 작가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
[책 속 명문장] 밀리언셀러 작가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
  • 전진호 기자
  • 승인 2020.01.09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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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호 기자] 파잔(phajaan)은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하는 의식. 절반의 코끼리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며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코끼리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렴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엄마를 찾아선 안 된다는 것과, 몽둥이의 고통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코끼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몽둥이를 든 가난한 자들에게 분노가 솟구친다. 하지만 분노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이것이 단순히 선악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자들도 피해자일지 모른다. 그들의 영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일지도 말이다. 그들이 처음 아기 코끼리를 구타하는 것을 주저할 때, 그의 가정과 사회는 그에게 친절하게 말했을 것이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네가 지켜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하라. 결국 그는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했을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어느 곳에서는 매 맞는 코끼리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4~5쪽> 

우주의 크기를 들여다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월적 거대함 앞에서 내 일상의 사소함은 너무도 하찮게 느껴진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류가 ‘신’을 놓지 못하는 철학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인간의 가치 때문이다. 이 거대한 세계를 창조한 신이 인간의 기원일 것이라는 상상은 나의 존재론적 하찮음을 해소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위안도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때면 쉽게 무너지고 만다. 만약 모든 존재가 실제로 신의 창조로부터 비롯되었다면, 그가 초공간의 다중 우주를 창조했고 영원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 속에서 수없이 점멸하는 미니 우주들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봤다면, 그리고 그중 하나의 미니 우주에서 수천억 개의 은하가 탄생하고 죽는 것을 지켜보고, 그중 하나의 작은 은하 변두리에 위치한 먼지보다 작은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서 수많은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본 이후에, 그 지구 위에 잠깐 존재하고 사라지는 인간의 삶에 그토록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111~112쪽>

위대한 스승은 수많은 시대와 장소에서 탄생했다. 그중에서 특히 경이로운 시기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축의 시대는 인류 정신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된 시대였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고타마 싯다르타가 등장했고, 중국에서는 노자, 공자가 활동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태어났다.
축의 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다. 그는 1949년에 출간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모든 정신적 기원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대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 공통적으로 위대한 스승들이 거대 사상을 설파했는지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바로 앞선 시기가 세계 각지에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를 겪은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자연에서 태어나 넓은 들판을 떠돌던 인류는 이 시점부터 거대한 도시에서 태어나 문화와 상징 체계 속을 살아가게 되었다. 도시 생활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좁혔고, 경제, 정치, 사회적 갈등을 증폭했으며, 이는 폭력과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어쩌면 축의 시대는 처음으로 문명을 일으키고 그로 인한 문제에 직면한 인류가 필연적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사유의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174~175쪽>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
채사장 지음 | 웨일북(whalebooks) 펴냄│556쪽│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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