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능이 불편하다면 어른이 됐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능』
[리뷰] 예능이 불편하다면 어른이 됐다는 것이다 『아무튼, 예능』
  • 김승일 기자
  • 승인 2020.01.09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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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웃으라고 만든 방송을 보면서 왜 울고 싶고, 외면하고 싶어졌을까.” TV를 집착할 정도로 좋아해 방송국 PD가 되고 싶었으나, 곧 PD는 방송을 많이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임을 깨달은 저자는 PD는 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방송국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근무하면 텔레비전이 싫어져”라는 선배들의 말처럼 텔레비전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저자가 그토록 좋아했던 텔레비전이 싫어진 이유는 비단 고된 방송국 일에 몸이 힘들어서만은 아니었다. 방송에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생각이 깊어질수록, 삶이 힘들어질수록 그 불편함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스타들이 대신 발품을 팔아서 집을 구해주는 프로그램인 MBC '구해줘 홈즈'는 저자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미쳐버렸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부동산 가격과 도무지 어떻게 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집과 방에 대한 고발 르포”였다. 외적으로는 집을 잘 구하는 팁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임이 분명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자신의 몸 하나 누울 수 있는 공간조차 구하기도 힘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회차에서는 스타들이 신혼부부를 위한 2억짜리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는데, 이들의 여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겨우겨우 찾은 첫 번째 집은 창밖으로 밀림처럼 우거진 잡초숲과 꽉 들어찬 비닐하우스 풍경이 보이고, 어디로든 나가기 위해서 산 밑까지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두 번째로 찾은 집은 창밖으로 벽만 보였고, 북촌 한복판 골목에 위치한 세 번째 집은 바깥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집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러한 장면들은 이사를 거듭할수록 집 안의 가구가 하나씩 사라지는, 그래서 지금은 극도로 미니멀한 방에 살고 있는 저자의 삶과 맞물리며 고통으로 다가왔다.      

‘대.국.민.여.러.분. 안녕하쎄요~’ 라는 주제곡을 들으면 떠오르는 예능 '안녕하세요'를 본 저자는 이 프로그램이 종종 타인의 고민을 그저 자극적인 소재로만 사용하고 마는 행태가 안타까웠다. 시청자와 출연진은 고민이 클수록 재미를 느꼈고, 고민에 대한 제대로 된 솔루션이 필요할 때는 무책임하게 회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프로그램에서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인 코미디언과 가수 등은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안녕하세요'는 고민의 근원을 해결하기보다는 잔인하게 심판하는 셈이다. 프로그램은 마치 북한의 인민재판을 방불케 하듯 사람을 둘러싸고 창피를 준다.  

저자는 '안녕하세요'에 대한 비평에서 더 나아가 인생의 심각한 고민들에 거리를 두고 무기력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린다. 명랑했던 여동생이 남초 회사에서 겪었던 성차별 등을 토로했을 때, 친한 선배가 종강 때 교수와 선배에게 추행을 당하고 휴학을 결정했을 때, 저자는 아무 힘이 되지 못함에 자괴감에 빠졌었고, 그러한 피해들이 시간이 지나 단순한 가십거리로 치부될 때조차 막을 수 없었다. 저자는 “어떤 고민은 가십이 되기도 하고 어떤 고민은 큰 변화의 불씨가 된다”며 “시시콜콜한 잡담형 고민들로 웃는 것이 가능하다면 문제적인 고민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다루며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고민에 경중은 없지만, 그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자신과 타인의 고된 삶을 다양한 TV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부조리와 연결하며 불편한 점을 끌어낸다. TV 비평인 동시에 인생 비평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평은 대부분의 사람이 막연히 그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으나, 지금까지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TV를 싫어하게 됐지만, 저자는 TV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TV를 포기하면 더  이상 불편한 점을 마주할 수도, 고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의 장래희망이라면 TV를 끄거나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대신, 죽기 직전까지도 한국 방송의 가장 열렬한 시청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TV를 통해 삶을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아름답다. 

『아무튼, 예능』     
복길 지음│코난북스 펴냄│224쪽│9,900원

*해당 기사는 월간 <공군> 1월호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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