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지금 변변히 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울렸던 그의 지난날조차 잊혀져야 한다는 말이 답이 될 수는 없다
모든 피아노가 갈채의 무대를 꿈꾸는 것만은 아니듯이
제 소리만큼의 울림과 결절을 껴안으며 피아노가 된다
저 검다란 피아노가 먼지를 벗 삼아 내려앉은 자리는
그가 찾았거나 아직 찾고 있는 중인
온갖 답들을 향한 질문으로 뜨거울 게다
「피아노 비가」 <17쪽>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부터 생각한다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까지 야근하며 휴일도 없이 일하다
부서진 열아홉 제빵 근로자의 하루하루가 쪽잠 속에 절그럭대는 놋쇠 사슬이어서
그 꿈은 새벽 공기를 타고 오를 듯 가벼웠으나 꿈을 위해 일어서야 할 몸은
꿈조차 휘발된 지 오래인 내 몸만큼이나 얼마나 푸석푸석했을는지
「열아홉이 깨운다」 <50쪽>
젊음에서 늙음으로, 문명에서 자연으로, 여자에서 어머니로
흘러가는 생의 시곗바늘 위에서
순자는 선영의 피할 수 없는 미래이고
선영은 선영의 잠깐의 허상이고
선영은 순자의 간지러운 겨드랑이 깃털이었던가
서로의 숨결을 가까이 느낄 때마다 흠칫 놀라
멀리 달아나는, 두 욕망
「시골 순자와 서울 선영이」 <85쪽>
하루가 저물면
시는 쓰지 않고
식탁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
어디다 시를 두고 온 사람 모양
골똘히 아래만 보고 있는 여자
머릿속은 가득하지만 시만 들어 있지 않은 여자
뒤숭숭한 세간들 사이로 시만 실뱀처럼 빠져나간 여자
꽉 차 있으나 늘 텅 비어 있는 여자
「시 쓰는 여자」 <101쪽>
『60조각의 비가』
이선영 지음 | 민음사 펴냄│144쪽│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