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역사 서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차세대 고전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책 속 명문장] 역사 서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차세대 고전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 전진호 기자
  • 승인 2019.12.1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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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세계사란 무엇인가? 단순히 세상에 존재해 온 개개 국가와 제국, 문명의 역사를 한데 추린다고 세계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국가, 제국, 문명 등의 구성단위에 담긴 공통의 주제는 물론, 그것들이 상호작용해 온 방식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뿐인가, 다양한 인간 공동체 사이의 지식과 기술의 전파 역시 그런 접근으로는 추적 불가능하다. 세계사는 반드시 공통의 주제와 발전을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 그렇게 하되 어느 한 집단의 경험에 치중하는 일 없이, 각기 다른 인간 공동체 모두의 경험을 담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오늘날 세계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는 심한 결함과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책의 근본 논지다. 그러한 결함은 뿌리 깊은 유럽 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 유럽 중심주의는 ‘서구 문명’을 세계사의 주된 동력이라고 보며, 서구 문명 안에 인간 사회와 인간 사고의 모든 훌륭하고 진보적인 것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서구 이외의 전통과 사회가 가진 역할과 중요성이 간과되고 무시되곤 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 사람 대다수의 경험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 책은 인간의 역사를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세계사의 집필에서 가장 흔히 시도되는 방법 중 하나가 일련의 ‘문명’ 위주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맨 처음으로 시도한 이는 오스발트 슈펭글러로, 1932년에 번역돼 나온 『서구의 몰락』이 그의 주저다. (중략) 슈펭글러는 문명이 외부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실체라고 보았고, 문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도 대체로 예술과 철학이라 여겼다. 각 문명은 저마다 깊숙한 곳에 ‘영혼’을 간직하고 있고, 이것이 문명에 배어들어 문명을 이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식의 접근법으로 가장 유명한 책은 아널드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로, 1930년대 초반부터 근 30년에 걸쳐 열두 권이 출간됐다. 토인비는 20세기 초반 유럽 세계의 전형적 소산이라고 할 인물이었다. 사회 진화론자였던 그는 문명이 유기체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문명은 자연환경 속의 ‘도전과 응전’을 통해 등장하며 생존을 위한 투쟁 과정 속에서 탄생, 성장, 붕괴, 해체라는 공통된 주기를 겪는다고 봤다. 엘리트주의자로서 토인비는 이러한 문명의 역사에서 중대 요소를 이루는 것은 ‘창조적 소수’라고 믿었다. (중략) 

이런 접근법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문명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이며, 이제껏 지구에 문명이 몇 개 나타났는지에 대해 의견이 전혀 일치되지 않고 있다. 토인비만 해도 작업 초반에는 문명을 스물세 개로 나열했지만, 막상 막바지에 이르자 목록이 스물여덟 개로 달라져 있었다. 퀴글리의 경우 문명은 열여섯 개뿐이라 여겼다. 이와 달리 열아홉 개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도 있다. (중략)

문명을 기반으로 세계사를 연구할 때 생기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는 문명의 성격이 대체로 ‘고차원 문화’의 특징, 즉 문학작품(특히 ‘위대한 저작들)과 철학, 종교, 예술 양식을 갖고 정의된다는 점이다. 이들 활동들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 내 소수 엘리트층만 담당했는데도 말이다.(몇십 년 전만 해도 세상 사람의 태반이 문맹이었다.) 따라서 세계사를 논하면서 ’문명‘에 방점을 찍으면 그러한 요소를 인간 역사에서 지나치게 중시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좀 더 면밀히 탐구해 보면 이들 ’문명‘은 거의 제각각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과 서유럽만 봐도 분명하다. 중국과 서유럽에 각기 다른 문화가 생겨난 것은 인간 사회의 발달 방식이 달라서이기도 했겠지만, 애초에 두 지역이 그만큼 큰 차이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명이 어떤 ’본질적 특성‘을 가진다는 생각, 나아가 그런 특성이 세월을 건너뛰어 후대로까지 전수된다는 생각도 아주 틀리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특정 사실을 간과한 것으로, 중국과 서유럽 모두 2000년 전 조건과 비교해 봤을 때 거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다. 문명이 가진 특성 중 세월을 건너뛰어 후대로까지 전수되는 부분은 실제로 미미한 수준에 그친다는 이야기다. 그뿐 아니라, 문명사적 접근을 취해 본질적으로 ’지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면 인간 역사 전반을 살피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이는 각자 고유한 발전 패턴을 보이는 사회, 경제, 기술, 군사 전략의 영역에서 특히 그렇다. 따라서 어떤 문명을 수천 년 전에 존재한 다른 문명과 비교하는 것은, 그사이 일어난 경제적, 기술적, 사회적 발전을 무시한다는 면에서 온당치 않다. <21~24쪽>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사 1』
클라이브 폰팅 지음│왕수민·박혜원 옮김│민음사 펴냄│856쪽│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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