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시로 톺아보는 세계의 슬픔 『사과 얼마예요』
[책 속 명문장] 시로 톺아보는 세계의 슬픔 『사과 얼마예요』
  • 전진호 기자
  • 승인 2019.12.1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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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전진호 기자] 한 영혼이 다른 하나에게 다다르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했나. 인간의 침대에서 인간의 옆구리에 코를 묻고 잠들며, 너는 존재의 평등을 나누는 기분이었나. 아주 걸을 수 없게 된 두 해 동안, 너는 늘 내 왼쪽 가슴에 안겨 산책을 나갔다. 간혹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던, 두 눈에 고인 천국이 가만가만 나를 흔들고는 했다. <61쪽>

시인은 현실이라는 우물에 고여 있는 순간들을 시의 언어로 길어 올린다. 시인의 시선은 오랫동안 함께 지내 온 개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무심코 펼친 책에서 운명적인 문장을 만났을 때, 늙은 어머니와 조용히 저녁을 먹을 때처럼 일상적인 차원을 향하는 동시에 실제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들에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 다양한 층위의 순간들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비애의 감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이렇게 우물 밖으로 올라온 순간들은 당장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결과물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곳으로, 현실 너머의 진실을 비추는 매개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시인의 시선은 너무 어두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곳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건 이오니아식 죽음. 경쾌하고 정교한 질서 속의 일.

닿을 수 없는 두 입술의 희미한 갈망으로 지상에 먼저 발을 디딘 사과의 그림자가 사과를 받쳐 주었다. 그림자의 출현은 태양과 사물간의 밀약에 천사가 개입하는 것. <126쪽>

시인은 자신의 몸을 밧줄로 묶어 어두운 우물 아래로 직접 내려간다. 현실을 가득 메운 비애의 감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근원을 더듬어 보기 위해서. 세계의 슬픔을 짊어지고 슬픔의 근원을 찾아 나서는 행위는 사뭇 비장하다. 언제 끝날지, 아니면 끝이 날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한 이 시도가 이토록 절실한 이유는 그 근원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본능적 확신이 작동하기 때문일 테다. 근원은 아직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시인이 의지한 밧줄은 무한히 늘어나고, 우물 속 어둠은 끝없이 이어진다. 자신을 걸고 나선 길 위에서 시인은 많은 슬픔들의 해답이 되어 줄 근원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과 얼마예요』
조정인 지음 | 민음사 펴냄│184쪽│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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