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일본의 진보적 양심 작가 『마쓰다 도키코』
[포토인북] 일본의 진보적 양심 작가 『마쓰다 도키코』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12.1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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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조선인과 인간적으로 교류했던 일본의 진보적 양심 작가 마쓰다 도키코.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정치에 맞서 투쟁하면서 일본인 노동자뿐 아니라 조선인 징용자, 중국인 포로 등의 권리 대변에 앞장섰던 그의 삶의 순간이 이 책에 담겼다. 

책에는 작가의 탄생, 학창시절,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시기별로 구분돼 실렸고, 평론과 사진이 덧붙여졌다. 아울러 도키코와 친분을 유지했던 사회단체 대표와 동료, 사회운동가들의 증언, 언론 인터뷰 내용 등도 포함됐다. 이 책의 옮긴이이자, 도키코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국의 관점에서 조명하며 국내에 알려온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는 "도키코는 작품 『땅밑의 사람들』 등을 통해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와 광산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의 일상과 애환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그만큼 조선인의 내면을 잘 이해한 작가는 드물다"며 "그는 생전에 일제 피해자 문제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와 피해자 위령비 건립, 전쟁 재발 방지를 위한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의 평화정신은 오늘날에도 여러 시사점을 전한다"고 말한다. 

1946년 5월 식량 메이데이. '식량위기돌파 국민대회'가 인민광장(황거 앞 광장)에서 열렸다. 전쟁 후 심각한 식량 위기가 찾아왔다. [사진=소명출판]
1946년 5월 식량 메이데이. '식량위기돌파 국민대회'가 인민광장(황거 앞 광장)에서 열렸다. 전쟁 후 심각한 식량 위기가 찾아왔다. [사진=소명출판]

패전 후 약 1개월 반이 지나 도키코는 40세의 나이로 셋째, 딸 후미코를 출산했다. 장남 데쓰로는 17세, 차남 사쿤도는 15세가 돼 있었다. 전쟁 후 첫 메이데이에는 50만명이 참가했다. 도키코는 나카노의 기아돌파구민대회에서 3월 창립된 '부인민주클럽'의 서기장 구시다 후키를 만난다. 이는 평생을 둘이서 친하게 지내는 교류의 계기가 된다. 그 다음날에는 25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식량위기돌파 국민대회(식량 메이데이)가 황거 앞 광장에서 열렸다. 그러자 다음날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가 데모금지 명령을 내렸다. 점령정책이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 해 도키코는 식량 확보투쟁에 집중하는 한편 신일본문학회 제1회 창작 콩쿠르의 선발자로 나섰다. 10월의 제2회 대회에서는 상임중앙위원으로 취임했다. <78~79쪽> 

1958년 7월 마쓰카와 사건 현지답사. [사진=소명출판]
1958년 7월 마쓰카와 사건 현지답사. [사진=소명출판]

냉전 체제 하 GHQ(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경제정책으로 불황이 심각해져 도산이나 해고가 잦았다. 1949년 여름에는 (공산)당과 노동운동에 얽힌 모략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7월 4일 맥아더가 '일본은 불패의 방공방벽'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그날, 국철은 3만700명의 해고를 통보했다. 2일 후에는 국철의 시모야마 총재가 차에 치여 사체로 발견됐다. 그날 도시바는 4,600명의 해고를 발표했다. 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8월 17일에는 도호쿠 본선 열차전복, 즉 '마쓰카와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당국은 노동쟁의와 관련한 국철·도시바의 활동가 등 20명을 체포·기소했다. 도키코는 이 무렵 이미 『노동자』에 「분투」를, 『주오코론(중앙편론)』에 「해고의 현장 지대를 가다」라는 르포르타주를 써서 노동자 해고의 현 상황을 호소하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 진상해명과 무고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 뒤 지역에 국민구원회 지부를 결성해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79쪽> 

1961년 5월 '나나쓰다테 조혼비' 앞에서. '중국인포로순난자 위령실행위원회'로부터 하나오카 사건 희생자의 유골이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사단 단장으로서 유골 수습을 진행했다. [사진=소명출판]
1961년 5월 '나나쓰다테 조혼비' 앞에서. '중국인포로순난자 위령실행위원회'로부터 하나오카 사건 희생자의 유골이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사단 단장으로서 유골 수습을 진행했다. [사진=소명출판]

1950년 1월 <화교민보>와 <아카하타>의 기사를 통해 도키코는 하나오카 사건을 접한다. 전쟁 중 노동자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에서 강제 연행된 사람들 중에서 아키타현 하나오카 광산에 끌려온 1,000여명 정도가 엄격한 감시하에 노예처럼 노동을 강요당했다. 그 처우에 참을 수 없어 패전의 해 6월에 봉기했지만 3일 만에 진압돼 회사 측의 린치와 학대, 혹사에 의해 절반 정도의 중국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였다. 흩뿌려진 유골 발견을 계기로 세상에 드러난 이 문제를 접하고 도키코는 경악했음은 물론 하나오카 노조 대표에게 연락을 취해 현지를 방문했다. 사건 1년 전에 나나쓰다테 갱도에서 난굴로 인한 함몰 사건이 있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 22명이 생매장됐던 참사도 알게 됐다. <79쪽> 

발굴된 유골. [사진=소명출판]
발굴된 하나오카 사건 희생자 유골. [사진=소명출판]

방치된 유골을 보고 눈물을 흘린 도키코는 그 이후 지역사람들과 함께 유골 발굴 작업에 참가해 중국 본토 송환 때에도 동행했다. 하나오카에 위령비를 건설하는 작업에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오카 사건에 관한 많은 르포르타주를 집필했으며 소설 『땅밑의 사람들』을 발표했다. 이 해에는 스탈린 간섭으로 인한 당의 분열(50년 문제)이 있었다. 지역의 세포는 물론 신일본문학회에서도 회의 중심멤버에 대립하는 입장에서 『인민문학』이 발간되는 등 여러 분규가 이어졌다.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맥아더의 반공 공격이 시작됐다. 경제적으로 곤란해서 생활보호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도키코는 하나오카로 발길을 옮겼다.  마쓰카와 투쟁에서 전원 무죄라는 승소 판결을 받을 때까지 도키코는 14년간의 세월을 20명의 피고와 그 가족의 편에 서서 계속 투쟁했다. <79~80쪽> 

『마쓰다 도키코』
마쓰다도키코회 (엮음) 지음 | 김정훈 옮김 | 소명출판 펴냄│216쪽│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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