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예방 접종
마음의 예방 접종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12.0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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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삭풍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저녁나절이다. 집안일에 쫓기던 발길을 멈춘 채, 아파트 베란다 창을 열었다. 서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에 유혹돼서이다. 이때 주황빛 노을이 마치 메마른 내 가슴까지 곱게 물들이는듯하여 잠시 그 빛에 도취했다.

흔히 노을을 인생 황혼에 비유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노을을 바라볼 때마다 어린 날 추억에 잠기기 일쑤다. 노을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대여섯 살 때 일이 뇌리를 스친다. 외가를 찾았을 때 외삼촌은 나를 위해 외가 마당 꽃밭 옆에 그네를 매주었다.

하루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외삼촌은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읍내에서 시오리 쯤 되는 신작로 길을 자전거로 달려서 외가로 돌아오곤 했다. 그때는 외삼촌이 고등학생인 줄 몰랐다. 평소 유독 나를 귀여워했던 외삼촌이다. 그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눈깔사탕이며 풍선 등을 읍내에서 사와 내 손에 쥐어주곤 하였다.

또한 나를 그네에 태우고 하늘 높이 밀어줄 때마다 가만히 입속으로 ‘메기의 추억’이란 노래를 흥얼거리곤 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그 곡 선율이 매우 감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내게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솝 동화는 나의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겨울 어느 날, 외가를 찾았을 때 일이다.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외삼촌은 그날 밤 내 머리맡에 빨간 털양말을 두 개 놓아두었다. 그리고 내가 잠자는 사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꼭 갖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그 양말 속엔 머리핀이며, 그토록 갖고 싶었던 빨간색 머릿결을 지닌 눈이 커다란 예쁜 인형이 들어있었다. 그 선물을 받은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밤마다 머리핀을 머리에 꽂고 잠들곤 하였다. 인형은 항상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자석처럼 붙어 지내곤 했다.

어린 날 내게 무한한 상상력과 감성을 불어넣어 준 외삼촌이다. 노을이 서쪽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일 무렵이면 외삼촌은 내가 탄 그네를 밀어주면서 노을 색이 왜 붉고 아름다운가에 대한 설명을 자상히 들려주었다. 이때는 아침, 저녁에 비해 한낮 태양 빛이 대기층을 수직으로 통과하여 대기를 통과하는 거리가 짧다는 것도 몰랐다. 또한 아침, 저녁에 대기층을 통과하는 빛이 많은 짧은 파장의 빛으로 태양 빛이 노랗다가 다시 오렌지색으로, 그리고 붉은색으로 변한다는 사실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 당시엔 어린 눈에도 마냥 노을이 신비롭고 경이롭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어린 날 외삼촌과 함께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요즘 어린이들 가슴엔 어떤 추억이 행복한 기억으로 자리할까?’ 궁금하다. 자연과 접할 기회가 적고 눈만 뜨면 학원 순례와 주입식 공부에 지쳐만 가는 어린이들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시간보다 어려서부터 인터넷, 스마트 폰 등 영상매체에 익숙한 어린이들 아닌가.

사람은 태어날 때 860억 개의 뇌세포(뉴런)을 지녔단다. 이 뇌세포에 의해 아이들은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법칙 및 픽션과 논픽션 차이를 학습하게 된다고 한다. 산타할아버지가 하룻밤에 많은 어린이들 집을 방문할 수 없고, 사슴이 이끄는 썰매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사실도 실은 알게 된단다.

이에 뇌 과학자이자 랜돌프 메이컨 대학교수인 램버트는 “하지만 오래된 기억을 전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어느 신문 기사에서 밝혔다. 또한 램버트는 “어린 시절 산타를 믿는 것, 산타를 ‘살아있게 보호하는 것’은 건강을 위한 예방 접종만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로 보아 우리 뇌 속에는 ‘정신적 시간 여행(mental time travel)’을 위한 시스템이 저장돼 있다는 말이 맞는 성싶다. 이는 음식을 줄 때마다 종소리를 들었던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는 것과 같은 이치란다.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노라니 참으로 많은 일들로 분주했던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몇 해 전부터 잃었던 건강을 다시금 되찾게 되어 기쁘다. 그러고 보니 어린 날 외삼촌이 즐겨 부르던 노래 ‘메기의 추억’,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아름다운 노을, 그리고 외가 꽃밭 옆에 매어졌던 그네, 외삼촌이 들려줬던 산타 할아버지 이야기, 이솝 이야기 등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다. 돌이켜보니 이렇듯 외삼촌과 함께한 지난날 추억은 삶 속의 고통과 시련을 용케 견디게 해준 강력한 항체(抗體)였다. 또한 어린 날 이 기억들은 그야말로 나의 심신을 굳건히 지켜 줄 수 있는 예방 접종 역할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즈막도 그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한껏 행복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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