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사라지는 골목에서의 마지막 추억 『고양이와 할머니』
[포토인북] 사라지는 골목에서의 마지막 추억 『고양이와 할머니』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11.13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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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때론 1,000개의 이야기보다 사진 한장이 강력한 힘을 지닐 때가 있다. 이를 테면 고양이 사진 같은. 보는 순간부터 시선을 사로잡고 마음을 휘젓는 고양이 사진을 찍어 고양이 작가로 불리는 전형준 작가. 어느 겨울, 마당에 찾아온 길고양이 가족의 사진을 홀린 듯 찍다가, 이를 계기로 고양이 작가 반열에 든 그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왜 많은 동물 중 하필 고양이였느냐'고. 순간 그는 뭔가 철학적이고 거창하고 멋있는 말을 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지만, 떠오른 말은 "그냥 귀여우니까요"가 전부였다.  

책에는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 근처부터 재개발 지역까지 부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기록한 수많은 길고양이 사진이 담겼다. 또 그  부산 할머니들의 투박하지만 정겨운 사투리와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들어 보는 이를 흐믓하게 한다. 

꽁알이 할머니.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3, 40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할머니는 아들들을 다 서울로 보내고 혼자 사셨다. (중략) 할머니와 고양이들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바다가 가까운 할머니의 마을엔 쥐가 많았다. 할머니 댁에도 쥐들이 들어와 쌀 포대를 뜯어 놓는 일이 잦았는데, 그러다 집의 나무 기둥까지 파먹어 구멍을 낸 것이 결정타였다. 아는 사람이 기르던 고양이를 쥐잡이용으로 데리고 오셨는데, 처음엔 찐이라고 부르시다가 콩알만 한 게 야옹야옹 말도 많다고 '꽁알이'로 개명하게 됐다. "매일 동네 약국에서 쥐약하고 쥐 끈끈이 사서 뿌려 대도 그때뿐이고, 동네 친구한테 고양이 빌리가 나무 기둥 앞에 놔뒀더니만 구신같이 쥐가 집에 안 들어오드라. 내가 그때부터 동네 약사놈 봐도 아는 척 안 했다!" <9쪽> 

꽁아이들에게 밥 주시는 할머니.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꽁아이들에게 밥 주시는 할머니.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할머니의 아침은 요란스러운 빈 그릇 소리로 시작된다. "아이고, 이노마들아! 스뎅 그릇 빵구 다 나긋다. 고만 핥아싸라! 간다, 간다!" 종종걸음 치며 2층에서 내려오는 할머니는 사료를 담은  통과 다리 높이가 제각각인 빨간 의자도 함께 들고 나오신다. 급한 녀석들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한 소리 들으며 먼저 먹기도 했다. 할머니는 꽁알이들이 오가는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담장 위에 밥을 놓아 주시는데 그 때문에 의자가 필요했다. 처음엔 다리 높이가 제각각인 의자가 영 불안했는데 할머니가 쿨하게 한마디 하신다. "총각이 뭘 모르네. 길이 얄구져서 이 의자가 골목에 딱 맞는다니까." 말씀을 듣고 보니 이 의자. 울퉁불퉁한 골목 바닥과 퍼즐처럼 묘하게 맞는 게 아닌가. <12쪽> 

찐이와 할머니.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찐이와 할머니.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슬하에 자식이 없는 찐이 할머니에게 찐이는 말 그대로 가족이었다. 할머니와 찐이의 첫 만남은 이랬다. 앞집에 사는 중학생이 동네 사거리 어디선가 혼자 있떤 아기 고양이를 데려왔는데, 부모님 몰래 자기 방에서 며칠을 키웠다. 하지만 학생이 학교에 간 사이 방을 청소하시던 어머니가 고양이를 발견했고, 결국 쫓겨나게 됐다. (중략) 아기 찐이의 걸음이 멈춘 곳이 할머니의 집 앞이었다. 마침 할머니는 그때 명탯국을 끓이고 계셨고 그 명태 건더기를 물에 씻어서 진이에게 준게 첫 묘연이었다고, 그 때문인지 찐이는 사료를 먹어도 꼭 할머니의 명탯국은 먹어야 했다. <69쪽>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찐이 할머니의 이삿날은 예정보다 앞당겨졌다. 이삿날에 큰비가 온다고 해서 갑자기 앞당겨진 것이다. (중략) 그런데 짐을 싸는 중에 찐이가 도망을 가서 어디 갔는지 종일 안 보인다는 거였다. 지금 캔 들고 찐이 부르며 찾고 있다고 꽁알이 할머니는 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중략)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이랬다. 오전에 도망갔던 녀석은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가고 조용해진 할머니 댁 앞을 기웃거리다 옆집 할머니들께 발견됐고, 소식을 들은 꽁알이 할머니가 동네 할머니 몇 분과 힘을 합쳐 잡으셨다고 했다. "할매가 찐이 놔두고 몬 간다고 찐아, 찐아 부르면서 동네 돌아댕기는디, 할매 쓰러질 것 같아서 조카가 일단 새집으로 데리고 갔다아이가."곧 찐이 할머니가 택시를 타고 오셨고 꽁알이 할머니는 "문디자슥, 니 땜에 오늘 쎄가 빠졌다. 할매하고 잘 살아라!"라며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 <91쪽> 

할머니가 살아 생전 입었던 조끼를 이불 삼아 자는 찐이.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할머니가 살아 생전 입었던 조끼를 이불 삼아 자는 찐이. [사진=도서출판 북폴리오]

할머니는 멀리 봄 소풍을 떠나셨다. 할머니의 소식을 접한 날, 봄비가 내리는 걸 보니 따뜻한 곳에 잘 도착하셨나 보다. (중략) 하루하루 기억이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찐이를 혼내 미안한 기억뿐이셨고, 병사에서 찐이 아직 안 들어왔냐며 찐이야, 찐이야 부르시곤 하셨다. 찐이는 곧 좋은 가족을 만났다. 하머니가 찐이에게 늘 "할매 집 말고 다른 집에 가면 할매한테 하는 거만치로 투정 부리고 그라믄 안 된다. 밥 가리지 말고 이쁜 짓도 하고. 알긋제?"라고 당부하셨던 덕분인지, 찐이는 새집에서 적응도 잘하고 애교도 많단다. <172~177쪽>  


『고양이와 할머니』
전형준 지음 | 북폴리오 펴냄│320쪽│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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