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중년 여성의 마음의 풍경 『깊이에 눈뜨는 시간』
[포토인북] 중년 여성의 마음의 풍경 『깊이에 눈뜨는 시간』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11.07 16: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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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삶이 점차 황혼으로 접어든다는 것을 체감할 때, 인간은 깊은 우울감에 빠진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옛날 같지가 않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숫자가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중년 여성으로서의 삶의 체험, 존재와 마음의 풍경을 섬세한 문체로 풀어내고 있다. 일상을 한 편의 여행으로 만드는 저자의 일기와도 같은 에세이. 천천히, 온전히 충족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저자의 태도가 이 책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다.

[사진= 도서출판 은행나무]

어차피 인생 전체가 매일 먹는 밥처럼 되풀이되는 날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일상이 나를 건져 올려줄 것을 믿어보는 것이다.<7쪽>

[사진= 도서출판 은행나무]

빵을 굽기 위해 밀가루와 물을 섞어 반죽하는 일은 시간과 수고가 든다. 지루하고 힘든 것이 당연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손목이 시큰거리도록 힘주어 반죽을 치대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은 답답하지만, 오븐에서 고소하고 따뜻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면 금세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나는 견딘다. 지극히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복잡한 감정과 문제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반죽을 부풀리고 형태를 만들어 달궈진 오븐에 넣고 구워지기를 기다리면서, 나 역시 점점 순해지고 부드러워진다.<32쪽>

[사진= 도서출판 은행나무]

아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때부터 서점에 자주 갔다. 서점에 가서 놀다가 책을 몇 권씩 골라서 집에 돌아오는 게 좋았다. 아이 핑계를 대고 구입한 책들도 많았는데 『도서관』도 그중 하나였다. 표지와 제목을 보자마자 기억 속의 국어 선생님이 생각났다. 사라 스튜어트의 『도서관』에 나오는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마른 몸에 희고 긴 손가락을 가졌던 국어 선생님과 꼭 닮았다.<99~100쪽>

[사진= 도서출판 은행나무]

옛날에 책만 읽는다고 눈을 흘기면서도 정작 읽기를 멈춰야 하는 심부름은 잘 시키지 않았던 엄마를 종종 생각한다. 그때 이미 당신의 딸이 게으른 손가락을 가졌던 걸 잘 알았던 엄마는 내가 끊임없이 허둥대며 외로울 것을 미리 알고 평생의 친구를 미리 만들어준 듯하다. 하여 집안일 사이사이 기억 속의 책을 다시 찾아 읽고 되새김을 하며 허기를 달랜다.<149쪽>

[사진= 도서출판 은행나무]

비 오는 날, 모종삽을 들고 종종거리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크리스마스로즈를 옮겼다. 『땅의 예찬』을 읽던 날,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마스로즈의 특성이 내 마음에 든다. 그것을 보려고 어찌 멀리까지 찾아가지 않으랴. 이 꽃은 저 있는 곳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 옮겨 심는 것은 독이 되나니, 꽃은 방해를 받고 싶지 않다.” - 한병철, 『땅의 예찬』, p50

어쩌자고 나는 저 있는 곳에 그대로 있고 싶어 하는 꽃을 방해했을까? 미안하다는 말도 거듭 들으면 성가실 뿐인데. 크리스마스로즈를 볼 때마다 잘못해놓고 눈치 보는 아이처럼 힐긋거렸다. 심통이 나긴 했지만 제풀에 죽어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꽃은 더 이상 성가시게 하지 말라는 듯 웅크렸다. 잎은 오므리고 꽃은 숨어서 피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크기로.<248~249쪽>

『깊이에 눈뜨는 시간』
라문숙 지음│은행나무 펴냄│256쪽│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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