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짐받이에 실린 쌀자루 또한 자비가 없었다. 오르막길에서는 상만을 잡고 늘어져 힘들게 하고, 내리막길에서는 등 떠밀어 곤두박질치게 했다. 그리고 평지에서는 온전히 상만의 두 다리에 힘을 실었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달리는 일은 공짜나 행운이라고는 없는 그의 삶과 같았다. 그럴 때면 열여덟 살 상만은 이미 외삼촌 나이쯤 된 것 같았다.<17쪽>
K는 여행자다. 여행가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직업이라면 여행자는 그것이 숙명인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그렇듯 K도 처음엔 자신이 여행자의 숙명을 타고났음을 알지 못했다. K가 처음으로 여행을 경험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49쪽>
사람들은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선택하지 않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미련도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삶을 안다 한들, 본다 한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기에는 미련이 남았다. 여행자의 삶이 익숙해지면 다른 세계의 운명에 개입하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66쪽>
K는 마음이 바뀌기 전에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유혹하듯 혀를 날름거렸다. K가 불을 붙이자 편지는 곧 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대신 K의 앞엔 무수히 많은 ‘가지 않은 길’이 놓였다.<66쪽>
허름한 바지가 걸렸지만 허구 것은 맞지 않아 빌릴 수 없었다. 바지마저 허구 것을 입으면 상만은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였다. 허구의 글 덕분에 상을 받고, 은주를 알게 됐고, 인터뷰를 하기로 했고, 인터뷰 장소에는 그의 옷을 입고 나간다. 하지만 상만의 씁쓸함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88쪽>
“1999년 12월 31일 밤 11시 59분 59초하고, 2000년 1월 1일 새벽 0시 1초하고 대체 무슨 차이가 있어? 그런데 그 1, 2초 사이에 대단한 변화라도 있을 것처럼 떠들어 대잖아. 여기저기 죽겠다고 난린데…….”
상만이 열을 올리며 한 말에 허구는 동의하지 않았다.
“글쎄? 1, 2초는 엄청난 차이야. 그 1, 2초에 운명이 바뀔 수도 있어.”<190쪽>
상만은 허구와 자신이 많이 닮았음을 깨달았다. 환경과 처지가 달랐을 뿐 섣불리 꺼내 놓을 수 없는 상처로 가득한 내면은 똑같았다. 하지만 상처를 덮는 방식은 달랐다. 허구는 아무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제 이름처럼 허구의 세계를 떠돌았고, 상만은 거짓으로 다진 반석 위에 뿌리를 내리려고 안간힘 쓰며 살았다.<250쪽>
『허구의 삶』
이금이 지음│문학동네청소년 펴냄│256쪽│11,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