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수사반장’ 고석만 PD 비망록 『나는 드라마로 시대를 기록했다』
[책 속 명문장] ‘수사반장’ 고석만 PD 비망록 『나는 드라마로 시대를 기록했다』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9.11.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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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수사반장’을 오랫동안 연출하며 터득한 것이 있다. ‘모든 증거는 현장에 있다. 현장을 혀로 핥아라.’ 이 말은 초동수사의 기본 원칙이다. 나는 이 원칙을 기획과 연출, 경영과 인간사, 그 밖의 모든 곳에 적용해 나갔다. 

‘검을 휘두른 사람이 전쟁사를 썼을 때 가장 진실한 전쟁사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서 검만 휘두른 사람은 최후의 기록자가 되지 못했다. 역사는 역사가, 문필가, 행정가에 의해 쓰여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오래된 관습을 깨고자 했다.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역사를 집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 묻은 검을 내려놓고 잉크 묻은 펜을 들어 현장을 기록했다. 진실이 문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TV 정치드라마 ‘제1공화국’을 연출하며 “우리 드라마의 주인공은 민주주의다”라고 외쳤다. 방송사 내부에서는 끝을 모르게 재미만 추구하고, 방송사 외부에서는 팔짱을 낀 채 ‘바보상자’라 비아냥거릴 때, 나는 그럴수록 오히려 해볼 만하다며 의지를 다졌다. ‘제1공화국’은 오늘의 시대정신을 끌어내고, 한국 TV 드라마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언론을 억압하는 독재정권하에서 짙은 안개를 헤치고 나갈 첨병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 ‘첨병’이 되고자 했다. 그동안 연출한 1,000회가 넘는 드라마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수난의 역사’였다. 하지만 방송사 고위층에게 첨병은 소모품일 뿐이었다. 첨병이 외부의 적을 탐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도 내부에 적과 내통하는 부역자가 있다면, 첨병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2009년 <한겨레>에서 원고를 청탁해왔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언론통제가 거듭될 즈음, 수난의 역사와 탄압의 수법을 폭로하자 했다. 사양했다. 탄압이 현재진행형이라면 현재 상황에서 출로를 찾아야 한다. 과거의 수난을 복기할 여유가 없었다. 

8년이 지난 2017년,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방송계에서 몇몇 회고록이 나왔다. 왜곡이 심했다. 탄압의 주역, 부역자가 시대가 바뀌자 거꾸로 탄압에 저항한 희생자인 양 회고했다. 그것은 마치 일제 부역자가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로 행세하는 꼴이었다. 비틀어진 회고록이 범람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중략)

졸문으로 책으로까지 낼 염치는 없었으나 현업을 하고 있는 후배의 권유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 글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오늘날 피디 지망생에게 좋은 지침이 됩니다. 기획에서 녹화, 제작까지 드라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트렌드를 따르기에 앞서 시대를 응시하는 눈, 최악의 제작 여건 속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치열함, 매번 익숙한 틀을 깨고 새로움을 시도하는 창의성을 프로그램마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피디 지망생뿐 아니라 현직 피디들에게도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중략)

허구와 판타지, 소위 막장드라마와 가벼운 예능프로그램이 대세인 요즘 트렌드에서 우리 삶과 사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드라마는 눈에 띄지 않는다. 온통 가볍다. 이 글을 읽으며 몇몇 독자라도 ‘피디란 무엇인가?’ ‘피디는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잠시나마 생각하게 된다면 졸고를 책으로 엮은 부끄러움을 덜 수 있겠다. 

『나는 드라마로 시대를 기록했다』
고석만 지음│창비 펴냄│396쪽│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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