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이제는 우리가 영화에 응답할 차례
‘82년생 김지영’, 이제는 우리가 영화에 응답할 차례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10.3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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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존재에 관한 설명만큼 난해한 작업이 있을까.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각자의 경험이나 처한 상황에 따라 타인의 존재가 달리 받아들여진다. 특히나 타인의 고통은 나의 그것과 비교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차별과 혐오가 생성될 수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저해(沮害)감을 느끼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책 『제2의 성』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인간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여성의 존재가 생물학적 조건이 아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부아르의 말을 빌려 <82년생 김지영>을 정의하면, 김지영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졌다. 도대체 누가, 무엇이 김지영을 ‘여성적인 것’으로 옭아 맺을까?

영화에서 여성은 늘 존재했지만 동시에 부재했다. 영화에서는 물론 영화 밖에서도 대부분의 여성은 ‘삶의 단독자’가 아니었다. 여성은 대개 남성과 관계된 ‘무엇’(어머니, 아내 등)으로 표상됐다. 사회가 규정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때, 그들은 징벌당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영화사 초기부터 발견되는데, 사사로운 욕망을 품은 여성의 생을 극단적인 비극으로 끝맺는 <미몽>(1936)과 <자유부인>(1956)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한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재현된 경우가 많지 않았다. <말아톤>(2005)의 어머니는 신화적 존재처럼 도탄에 빠진 자식을 구원하고, <귀향>(2015)의 할머니와 소녀는 역사의 비극에 짓눌린 피 흘리는 여성이었으며, <청년경찰>(2017)은 여성을 남성영웅 만들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여성은 성녀와 피해자 혹은 창녀의 이분법 구도 속에서 극단적으로 재현돼 왔다. 그렇다면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어떤 여성인가? 일각의 지적처럼 작위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이 난무한 ‘남성 혐오적’ 영화의 주인공에 불과할까?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이견이 있겠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정치적 구호로서 괜찮은 페미니즘 영화다. 사회가 틀 지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항변하고, 젠더적 위계에 의한 폭압이 여성의 육체와 정신을 얼마나 잔혹하게 말살하는지 설득력 있는 이미지로 제시한다. 동시에 사회가 여성 일반의 삶에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감각했는지에 일침을 가하며, 다소 아득하기만 한 동명의 원작 소설보다 명료해 오히려 삶의 진실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서 ‘진정한 여성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도덕적 흠결이 전무한 예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책 『여성영화 제고』에서 “‘여성영화’는 수많은 각도에서 정의될 수 있다. 여성에 의한 영화, 여성을 위해 만든 영화, 여성을 다루는 영화 혹은 이 모든 것의 조합”이라며 “동일시의 모든 지점(인물, 이미지, 카메라)이 여성의 것, 여성적인 것 혹은 페미니스트적인 영화로 정의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성영화가 단일한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로레티스의 말처럼 여성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정의될 수 있다. 로레티스의 여성영화에 관한 정의를 전제로 두고, 페미니즘의 가치를 지향하는 여성영화는 종국에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적 상황과 혐오를 없애는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결국 연대로 나아가는 여성영화는, 역설적으로 여성이 아닌 성을 어떻게 재현하느냐에 따라 그 결이 달라진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 캐릭터의 심리를 내밀하고 입체적으로 다루는 데 반해, 김지영의 남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남성 캐릭터는 이야기 작법 상 희생된 측면이 있다. 소설은 에피소드마다 일부 남성의 극단적인 면을 부각해 그려냄으로써 여성의 희생을 전면화한다. 이 과정에서 다소 작위적인 대사(혹은 상황)들이 난무하며 남성들은 전형적인 악인으로 전락, 납작하고 단선적인 존재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소설과 달리 영화는 여성 대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여기서 여성들 간의 연대가 더욱 강조되는데, 김지영을 보듬고 아끼는 어머니와 직장 동료들의 태도는 영화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환기구 역할을 넘어선다. 이와 함께 김지영에게 언어폭력을 가하는 일군의 무리에 여성이 포함돼 있다거나 아버지와 남동생의 반성적 태도, 우울증에 걸린 김지영을 상담하는 의사를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 바꾼 것 등은 영화로 각색되면서 조금 더 명료해지거나 변화한 부분들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김지영의 혼자 있는 뒷모습을 롱쇼트(멀리 찍기)로 포획하고,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 김지영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의 주제와 궤를 같이한다. 이는 그 자체로 여성의 고통을 방관하는 장면으로 수렴되는데, 결국 이러한 카메라의 시선은 이제껏 우리 사회가 여성의 고통을 대면할 때의 시선으로 전유되는 환영을 낳는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혼자, 뒷모습으로, 가려진 채로, 멀리 있다.

영화는 이제야 겨우 발언권을 얻은 82년생 여성의 입을 빌려, 이보다 훨씬 이전 시대부터 차별적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온 여성들의 삶을 대변한다. 영화의 만듦새 자체는 낡아서 새롭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생기와 부피를 얻는다. 영화는 묻는다. “누군가의 고통이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가?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말인지 당신은 아는가?” 시대가 영화를 호출했으니, 이제 우리가 영화의 울부짖음에 응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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