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 ‘속독의 함정’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 ‘속독의 함정’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10.2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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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1980년 7월 7일 MBC 예능 ‘묘기대행진’에 속독 소녀가 출연했다. 소녀는 엄청난 속도로 책을 읽어내려갔고, 그 모습은 여러 부모에게 큰 감명(?)을 선사했다. 방송 후 속독학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책 『개인주의자 선언』으로 잘 알려진 문유석 판사 역시 그중 하나. 아버지의 엄명으로 속독학원에 등록한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문 판사는 눈동자를 움직이며 시각적으로 정보를 바로바로 받아들여 획기적으로 독서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속독 기술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개그맨 이경규가 눈알을 좌우로 ‘띵요 띵요’ 돌리는 것처럼 최대한 빨리 훑어보는 게 관건. 분당 5,000자, 7,000자... 점점 속도가 붙더니 급기야 ‘묘기대행진’ 소녀를 능가해 300쪽짜리 책을 3분도 안 걸려 읽어냈다. 결국 문 판사 역시 방송에 출연하게 됐는데, 그의 현란한 독서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과연 어린 문 판사가 속독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빨리 읽는 기술을 습득하게 된 것일까? 정답은 “NO”. 당시 방송 출연을 두고 그는 책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나는 사기의 공범일까? 왜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바보 짓거리(속독)를 어른들이 돈 내고 와서 눈물 흘려가며 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회상했다. 속독은 특별한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한국근현대소설선, 세계문학전집, 일본역사소설 심지어 가정요리전집까지 보는 족족 독파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속독을 오해하고 있다. 오히려 최소 투입으로 최대 결과를 얻어내려는 효율성이 중시되면서 어쩌면 더 중요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출판가에 속독을 주제로 한 책이 여전히 출간되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들은 왜 속독에 열광하는 것일까? 가마타 히로키 교토대학교대학원 교수는 더 많은 정보를 빠르게 습득하려는 강박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책 『이과식 독서법』에서 “(속독에 대한) 강박은 지식 습득을 향한 완벽주의가 초래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지식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다”며 “각종 속독법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한다. 이어 “(책에서) 중요한 내용을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성공한 독서라고 볼 수 있다. 의미 있는 정보를 전부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자”고 권면한다.

베스트셀러 『공부머리 독서법』의 저자 최승필 독서교육 전문가 역시 속독을 비관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책에서 “나쁜 독서 습관의 99%는 속독이다. 책 한 페이지를 몇 초 만에 읽을 수 있는 능력은 놀랍긴 하지만 독서의 효과 측면에서 보면 질이 낮은 독서”라며 “책은 생각의 도구다. 독자는 책 속에 담긴 그 생각을 따라가며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대입하는데, 그 과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독자는 큰 성장을 이루게 된다. 정보는 광속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공감과 사유, 통찰은 광속으로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다수 독서 전문가는 “속독은 이름처럼 빠르게 습득하는 잔기술이 아니라, 오랜 시간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체득하는 고급기술”이라는 데 의견을 모은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 많이, 더 빠르게’를 강조하는 혼란의 시대. 히로키 교수는 “자기만의 속도로 독서를 이어가면 읽는 속도는 저절로 빨라진다”며 “(그 과정에서) 인생 문제를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성공한 독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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