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피와 눈물의 현대사 100년의 기록 
[포토인북] 피와 눈물의 현대사 100년의 기록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10.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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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은 1920년 망명지 상하이에서 독립투쟁사를 담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다. '혈사'란 이름처럼 책에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 등 독립군 전투까지 일제 침략에 대항하며 피흘렸던 독립투사들의 투쟁 역사가 담겼다. 박 선생은 앞서 1951년 『한국통사』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아플 통(痛)'자에서 드러나듯, 책 속에 민족사의 아픈 역사를 담아냈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로, <대한매일신문(현 서울신문)> 주필을 거친 후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저자는 박은식 선생의 통사와 혈사의 틀을 빌려 지난 100년의 역사 속 100가지 사건으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본다.

김원봉. [사진=도서출판 인문서원]
김원봉. [사진=도서출판 인문서원]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됐다. 언제 어디서 불쑥 나타나 폭탄을 더닞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의열단이라는 명칭은 김원봉의 작품이다.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취해 '의열단'이라 명명한 것이다. 의열단은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공포의 '마땅히 죽여야 할 대상', 즉 '7가살(七可殺)'로 ①조선총독 이하 고관 ②군부수뇌 ③대만총독 ④매국적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을 꼽았다. 또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기타 중요기관 등 다석가지 '파괴 대상'도 선정했다. <30~33쪽>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사진=도서출판 인문서원]

박열은 1902년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아버지 박지수와 어머니 정선동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보통학교 사범과에 합격한 박열은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는 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였으나, 사상이 건전치 못하다는 이유로 3학년 때 퇴학당했다. 1919년 3·1혁명에 가담한 것이 퇴학의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박열은 1919년 10월 도쿄로 건너갔다. 감시와 고문이 심한 국내보다 국외가 압박이 적겠다고 판단해 사상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일 목적으로 결행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 대지진을 전후해 일본 관헌에서 급진적 사상을 가진 사회단체를 일제 검속하면서 가네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 17명이 일경에 검거됐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 청년 혁명가와 일본인 여성(가네코)의 사랑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큰 화제가 됐다. 1926년 3월 25일 재판장의 사형 선고가 끝나는 순간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라며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려거든 죽이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신랄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64~67쪽> 

일본 경찰이 만세 시위를 벌이려는 군중을 진압하고 있다. 
일본 경찰이 만세 시위를 벌이려는 군중을 진압하고 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사진=도서출판 인문서원] 

1926년 6월 10일이 밝았다. 이날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일반 민중도 수만명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에는 30만명의 애도 민중이 상여가 통과하는 지역으로 몰려나왔다고 보도했다. 3·1혁명과 같은 일이 재현될까 두려워한 일제는 당일 현장에 무장한 군인 7만5,000여명과 2,000여명의 정사복 경찰을 동원하고, 인천과 부산에는 경계 부대를 출동시키는 등 삼엄한 경계 태세를 갖췄다.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대 중앙고보생 500여명이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살포하고 민중이 합세하면서 시가지는 3·1만세 시위와 같은 분위기가 재현됐다. 이에 놀란 일제는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출동한 일경에 붙잡힌 학생이 서울에서 2,000여명, 전국적으로는 5,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제령 제7호와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80~82쪽>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사진=도서출판 인문서원] 

조선의용대는 일제 강점기 가장 치열하게, 가장 마지막까지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해방 후 남쪽에서는 좌파로 몰려 소외되고 북쪽에서는 옌안파로 몰려 숙청당한 비운의 독립군 부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에서 창립됐다. 모체는 1935년 7월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이다. 민족혁명당 대표는 김원봉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난징에서 한인 청년 83명을 모아 장시성 성자현에 있는 중국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소시켜 정치·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조선의용대는 창립 초기 3대 목표를 제시했다. 첫째, 중국 경내에 있는 모든 조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해 중국 항일전쟁에 참가시킬 것, 둘째, 일본의 광범한 군민을 쟁취하고 동방의 각 약소민족을 발동해 공동으로 일본 군벌을 타도할 것, 셋째, 조선혁명운동을 추진해 조선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 것 등이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무기와 물적 자원을 지원받은 관계로 '중국 항일전' 참여를 제시했지만, 중국과 한국은 일제의 침략을 받고 있는 운명공동체였기에 사실은 우리 독립운동이 목적이었다. <128~130쪽> 

『통사와 혈사로 읽는 한국 현대사』
김삼웅 지음 | 인문서원 펴냄│520쪽│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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