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우리집’에 끝내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들
[송석주의 영화롭게] ‘우리집’에 끝내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들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10.0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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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집>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우리집>은 싫어하기가 힘든 영화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는 아이들, 일상을 수채화처럼 그려내는 영상미, 특히나 배우들의 싱그러운 연기는 보는 이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쉽사리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영화가 갈등을 만들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소 부실해진 핍진성(逼眞性)을 여러 영화적 장치들로 의뭉스럽게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핍진성이란 영화가 구축한 세계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정도를 의미한다. ‘생생함’ ‘그럴듯함’ ‘개연성’이라는 단어로 호환될 수 있는 이 핍진성은 이른바 ‘사실 같은 허구’를 만드는 조건으로, 감독이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어떤 상황을 선택하거나 설계하는 능력을 말한다. 쉽게 말해 뛰어난 감독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바탕에 두고, 그 현실의 규범과 관습을 깨면서 대다수가 동의하는 ‘매력적인 허구’를 만든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영화에서는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집> 역시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혼 위기에 처한 가정에서 아이가 겪는 심리적 고난.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들. 윤가은 감독은 현실과 그 현실을 지탱하는 물리적 조건들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현실의 규범과 관습을 깨뜨려 매력적인 허구를 만들고자 할 때, 영화의 핍진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이와 함께 아이들의 건강하고도 순수한 이미지는 부실해진 핍진성을 덮어버리는 도구로 일정 부분 소비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집>의 이미지들은 어떤 긍정적 해석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이끈다.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각자의 집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하는데, 누가 여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겠나. <우리집>의 이미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보다는 ‘인물’을 응원하게 만든다. 바로 이게 문제다. 그리고 피하고 싶은 질문 하나.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은 집으로 돌아가는데, 영화 속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이 질문을 발생시키는 결정적 요인들은 하나(김나연)가 유미(김시아)와 유진(주예림)을 데리고 그들의 엄마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 있다.

아이들은 엄마를 찾아 나서다 어느 해변에 도착한다.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풍기는 전반부와 달리 영화는 이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판타지 장르의 마법에 기댄다. 이 어설픈 마법이 영화의 핍진성을 무너뜨린다. 그 물적 근거는 바로 텐트다. 아이들은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갈등을 봉합하고, 텐트 안에서는 연대와 희망의 말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고작’ 그런 결론에 이르기 위해 아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했나. 하나는 부모의 이혼 위기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야 했고, 유진·유미는 집을 잃을 긴박한 순간에도 연락조차 되지 않는 부모를 곁에 뒀어야 했다. 요컨대 문제는 인물들이 겪은 고통의 깊이와 폭이 아니라 어설픈 희망을 구축하는 데 아이들의 이미지가 필요 이상으로 전시됐다는 데 있다.

<우리집>의 여정은 <기쿠지로의 여름>(1999)과는 다르다. 엄마를 찾아 떠나는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의 곁엔 모범적이진 않지만 꽤 괜찮은 어른인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가 있다. 마사오가 엄마를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관객이 안심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집>의 어른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유미네 부모는 영화 초반에 잠깐 뒷모습을 보인 이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집>과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아무도 모른다>(2004)가 관객을 납득시키는 이유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에 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차라리 그렇게 절망적으로 끝나는 편이 영화의 내적 논리에 더 부합하기 때문이다. 암흑의 순간에도 작은 빛이 있다는 교훈을 주기 어렵다면 그냥 암흑으로 끝나야 한다. 그것이 영화의 핍진성을 높이는 일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집>은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와 비슷한 결말을 보인다. 이 영화가 허탈했던 것은, 결국 집과 엄마를 잃은 무니(브루클린 프린스)가 자신의 친구인 젠시(발레리아 코토)의 손을 잡고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두 소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갔지만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가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영화는 무니의 건강하고 쾌활한 이미지를 영화 내내 전시하다가 끝내 증발시킨다.

그런 점에서 텐트 속의 아이들을 직부감으로 찍어 누르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기만적인 이미지로 보인다. 어떻게 그것이 연대이고 희망일 수 있는가. 영화가 끝난 이후의 상황을 상상해보라. 아마도 유진·유미는 과거처럼 계속 이사를 다니고, 그들의 부모는 일 때문에 앞으로도 자주 장기간 집을 비울 것이다. 이미 이혼에 합의한 하나의 부모는 각자의 인생을 살 것이고, 하나는 부모의 결여로 인해 책상보다 부엌 앞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사실 이건 상상이 아니라 합리적인 추론이다.

<우리집>은 아이들의 연대를 통해 어른들의 난장판을 극복하고자 하는 영화다. 그런데 그 연대가 과연 ‘유효한’ 연대인가? 글쎄.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갑자기 끝나버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이, 영화 속 어른들만큼 무책임하다는 생각은 지나친 것일까? 하나가 유진·유미의 진짜 ‘우리 언니’가 되더라도 상황은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데. 관객들이 볼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세 아이가 다시 만났을 때,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또 누군가가 버리고 간 텐트에 몸과 마음을 기댈 것인가? 그건 연대도, 희망도 아니다. 그저 잠시 훔친 불꽃일 뿐이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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