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피워낸 아름다운 꽃
그녀가 피워낸 아름다운 꽃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10.03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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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학창시절 우리 집은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땐 마음 놓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는 것이 절박한 소원일 정도였다. 집에서 공부를 하려면 어린 동생들의 방해로 예습, 복습은 주로 학교에서 해결해야 했다. 중학교 때 일이다. 다만 한 자라도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욕심에서 날만 새면 새벽 일찍 학교로 발길을 옮기곤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 못지않게 학교를 일찍 등교하는 같은 반 윤희와 매일이다시피 마주쳤다. 소아마비 장애를 지니고 있는 윤희는 늘 책가방 끈을 목에 걸고 한쪽 손으론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교실 문을 들어서곤 했다.

그때는 윤희와 제대로 말도 섞지 못했다. 평소 윤희는 말수가 적었고 무뚝뚝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 공부 또한 반에서 하위권이라 반 아이들도 왕따를 시켰지 싶다.

그러던 지난겨울 어느 날이다. 처음엔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에 외모는 변모했지만, 그녀의 이목구비는 변하지 않았다. 우수를 가득 머금은 듯한 길고 가늘은 눈매, 야물게 다물어진 작은 입, 그리고 웃을 때마다 한쪽 볼우물이 깊이 패는 까무잡잡한 얼굴은 학창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윤희를  만난 것은 우연히 들른 어느 서점에서다. 마침 시집 한 권을 고를 때, 시집 겉표지 위에 어떤 이의 손과 나의 손이 동시에 겹쳐 얹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다. 그녀 또한 나를 한눈에 알아본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잠시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느닷없이 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 한다. 나 또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윤희였다. 그날 우린 몇십 년 만에 만난 기쁨에 마침 점심때라 자리를 옮겨 식사를 나눴다.

그녀는 고국에 다니러 왔으며 현재 외국 어느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란다. 어쩐지 그녀의 외양에선 감히 범할 수 없는 비범함이 묻어났다. 낡은 가방을 항상 목에 걸고 한 손엔 목발을 짚고 한쪽 다리를 절며 학교에 다니던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현재도 다리는 절고 있었으나 목발은 짚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남다른 인내와 끈기다.

그 당시 윤희는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친구들에게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고 토로한다. 윤희가 학교를 누구보다 일찍 등교한 이유는 학교 앞의 언덕에 위치한 비탈길 때문이었다고 했다. 언덕에 경사진 길을 다리를 절며 힘겹게 오르내리는 자신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는 게 몹시 부끄러웠다고 했다. 그래 일찍 학교를 왔었고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이 학교 운동장을 다 빠져나간 다음 맨 마지막에 교문을 나서곤 했단다.

그러던 어느 날 열심히 공부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란다. 무엇보다 헌책방에서 읽은 책 한 구절이 자신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신시켰다고 했다. “어느 정도의 근심·걱정·고난은 항시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 바닥에 짐을 안 실은 배가 안전하지 못해 곧장 바다로 나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라는 쇼펜하우어의 언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단다. 그 후 그 애는 이를 앙다물고 공부에 전념해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했다. 이로 보아 그녀의 장애가 오히려 세상을 헤쳐 나가는 등불이 된 셈이다.

윤희에게 학창 시절 학교 앞 가파른 언덕길과 소아마비의 장애는 인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들을 자신을 곧추세우는 채찍으로 삼았다. 만약 학교 앞에 언덕길이 평탄했다면,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절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윤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노라 남들보다 몇 배의 피나는 노력과 투지를 불사른 그녀가 마치 봄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때론 견딜 수 없는 삶의 아픔이 인생 마디가 돼 내면을 성숙시킨다는 것을 새삼 깨우친다. 누구나 삶을 살며 자신 앞에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은 가로놓이기 마련이다. 또한 본의 아니게 역경과 고난에 부딪힐 수도 있잖은가. 그것이 비록 달구어진 쇠로 온몸을 지지는 듯한 뼈저린 고통일지라도 무쇠보다 강한 인내로 버텨야 할 것이다.

오늘이 힘들다고 해 일년생 초목처럼 서둘러 허약한 꽃을 피우려 애쓸 필요가 없다. 생애 단 한 번의 봄이 찾아올지언정 인내와 노력으로 그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끈기도 필요하다. 윤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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