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위로를 건네는 영화
내 삶에 위로를 건네는 영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9.26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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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스트 앤 본>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러스트 앤 본>(2012)의 여자 주인공 스테파니(마리옹 꼬띠아르)는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을 절단하게 되는 사고를 겪는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이건만, 이상하게도 알리(마티아스 쇼에나에츠)는 스테파니를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한다. 그러니까 알리는 스테파니의 ‘결여’에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거나 무작정 연민하지 않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신형철은 “기본적인 신뢰가 갖춰져 있는 조건하에서라면, 타인의 결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그것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알리의 무심한 태도가 생의 의지를 놓아버린 스테파니를 구원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큰 슬픔에 잠겨있을 때, ‘위로’를 건넨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지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어깨를 토닥인다. 하지만 때에 따라 이러한 위로가 상대방에겐 하나 마나 한 중언부언이 될 수도 있다. 틀에 박힌 위로를 할 바에는 차라리 그만 투정 부리라며 타박을 하는 편이 낫다. 당신의 ‘진짜’ 친구들은 그러지 않는가?

이번엔 영화 <삼포 가는 길>(1975)을 살펴보자. 영화는 공사판을 전전하는 영달(백일섭)과 무슨 사연인진 모르겠지만 ‘큰집’을 다녀온 정씨(김진규) 그리고 작부 백화(문숙)의 우연한 동행기를 로드 무비(road movie)의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일감이 떨어지면 다른 일터를 찾아 떠나야 하는 것이 공사판 뜨내기의 삶이고, “인천 노랑 집에다, 대구 자갈마당, 포항 중앙대학, 진해 칠구, 모두 겪은 년”이라는 백화의 대사에서 우리는 그녀의 고달팠던 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수감생활까지 한 정씨의 삶은 아마 진퇴양난과 암중모색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인생이 그러했듯, 그들의 동행 역시 순탄하지 않다. 화창한 날보다는 궂은날이 많으며 갈아입을 옷도, 배부르게 음식을 사 먹을 돈도 없다. 가장 극심한 것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길 위에 선 그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 그것은 ‘삼포’라는 지역으로 은유되는,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몸이 아닌 마음을 누일 어떤 절대적 안정이 있을 것만 같은 장소의 부재로부터 온다.

변해버린 고향 앞에서 흔들리는 정씨와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일터가 고향이죠”라는 영달.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지 않고 터미널의 깨진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일터가 될 곳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백화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당시를 살았던 하층민들의 곤궁했던 일상을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포 가는 길>이 빛나는 이유는, 이 영화가 구태의연한 위로나 희망의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는 데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례식장 시퀀스’를 보자. 배가 고픈 그들은 남의 장례식장에서 밥을 얻어먹기 위해 얄팍한 술수를 부리다 이내 쫓겨난다. 보통의 경우라면 주저앉아 신세를 한탄하거나 울음을 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는다.

영화 <삼포 가는 길> 스틸컷

영달과 정씨, 백화는 도리어 쌓인 눈 때문에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길 위를 신명 나게 뛰어간다. 그런 그들을 카메라는 멀리서 슬로 모션(slow motion)으로 담아낸다. 그들은 웃지만 관객들은 웃지 못한다. 성숙한 관객들은 그 웃음이 바로 울음 참기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삶이란 울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을 카메라는 멀리서, 천천히 담아낸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그 앞에서 목 놓아 울지 않는다. 짐짓 괜찮은 척을 하거나 “꾀병 부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며 마음에도 없는 타박을 한다. 내가 울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이 도미노처럼 그 울음에 휩쓸릴 것만 같으니까. 그것은 허술한 위장술이며, 처절한 방어술이다. 동행을 하는 내내 그들은 티격태격하지만 서로를 정성스레 보듬는다. 누구 하나가 울음을 울면 자신 또한 무너질 것임을 알기에.

어쩌면 ‘진짜’ 위로와 희망은 <러스트 앤 본>의 알리처럼 상대의 고통에 무심하거나(혹은 무심한 척하거나) <삼포 가는 길>의 세 주인공처럼 자신의 힘겨운 일상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용기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 영화는 인생에 어떤 유토피아가 있다거나, 절대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섣불리 말하지 않는다. 하긴 인생이란 원래 고단한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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