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인북] '우표'를 통해 본 지금은 사라진 근현대 시대의 나라들 
[포토인북] '우표'를 통해 본 지금은 사라진 근현대 시대의 나라들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09.18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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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가 횡행했던 시기에는 국가 간 종속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두번의 세계대전 당시에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국가 경계선이 지워졌다 다시 그려지곤 했다.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기인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 많은 나라가 근현대 시대의 거대한 역사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그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겼다. 

건축가이자 우표수집광인 저자는 "우표는 그 나라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구체적 물증이자 핵심 증거"라며 우표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나라들에 살았던 이들의 기록, 후대 역사가의 해석 등을 전한다. 

1894. 북보르네오에서 같은 해에 발행한 우표 위에 가쇄. 도안은 바다악어. [사진=흐름출판]
1894. 북보르네오에서 같은 해에 발행한 우표 위에 가쇄. 도안은 바다악어. [사진=흐름출판]

라부안은 보르네오섬 북서쪽 해안에서 8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섬이다. 1846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브루나이 술탄이던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2세가 라부안과 그에 인접한 작은 섬들을 영국에 넘기는 조약에 서명했다. 1864년부터 발행된 라부안의 우표들은 살가리(소설가)가 유럽 대중의 마음에 심어놓은 낭만적 선입견을 강화한다. 런던에서 제작·인쇄된 이 우표들에는 위용을 자랑하는 동물들이 근사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후 라부안이 겪은 변화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건물들은 황폐화되고, 석탄회사는 문을 닫고, 식민 정부에는 행정관을 포함해 단 세명의 관료만 남았다. 1907년 1월 1일, 라부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이 섬은 부근의 더 큰 영국령인 '해협식민지'의 관할 구역으로 편입된다. 섬은 그런 형태로 통치되다가 1963년 말레이시아에 이양돼 말레이시아 사바주의 일부가 된다. <57~63쪽> 

1877. 자마다르 단검과 데바나가리문자를 도안으로 한 우표. [사진=흐름출판]
1877. 자마다르 단검과 데바나가리문자를 도안으로 한 우표. [사진=흐름출판]

알와르는 크기가 충청남도 정도 되는 인도의 번왕국(藩王國)이었다. 아래쪽에는 액면가가 적혀 있고, 연이어 '3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이 숫자는 수수께끼다. 아마도 금형을 제작한 연도가 힌두력으로 1931년이라는 뜻일 듯하다. 그레고리력으로는 1875년이다. 도안에 등장하는 물건은 인도의 전통 무기인 자마다르라는 단검이다. H자 모양의 손잡이와 삼각형 칼날을 한 덩어리로 단조한 것이다. 이 도안은 어느 번왕이 자객 네명에게 쫓기다가 자객 우두머리의 허리에서 자마다르를 발가락으로 잡아채어 배에 꽂고 도망쳤다는 전설을 상징한다. 군주제가 종식된 것은 1949년 알와르가 훨씬 더 민주적인 인도연방에 합병되면서였다. 그러나 (왕이었던) 테지 싱 프라바카르 바하두르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은 주로 이 땅에 사는 민주적 성향의 무슬림들이었다. 여섯 달에 걸쳐 무슬림들은 거의 모두 추방되고 말았다. 테지 싱 프라바카르 바하두르는 델리로 돌아가서 쌓아둔 돈으로 편안히 살다가 2009년에 사망했다. <110~117쪽>

1891. 액면가 '사금 10센티그램'인 표준우표. 도안은 채금 장비를 소재로 했다. [사진=흐름출판]
1891. 액면가 '사금 10센티그램'인 표준우표. 도안은 채금 장비를 소재로 했다. [사진=흐름출판]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에는 티에라델푸에고라는 군도가 위치하고 있다. 그 이름은 스페인어로 '불의 땅'을 뜻한다. 원래 이름은 '연기의 땅'이었다. 티에라델푸에고는 오랜 세월 별 경제적 이점이 없는 곳으로 간주됐으나. 1800년대 이곳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영국인 정착민들이 양 떼를 풀밭에 풀자, 원주민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대대적인 사냥에 나섰다. 이는 대학살의 단초가 됐다. 학살은 주로 농장주들에 의해 이뤄졌다. 현상금은 원주민 한명당 위스키 한 병 또는 1파운드였다. 광란의 살육은 15년간 자행됐다. 살해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이내 전염병으로 죽었다. 유럽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병이 저항력 없는 원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금 채굴권을 지닌) 율리우스 포레르가 우표를 발행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도안은 채금 작업의 기본 연장인 세척용 대야, 양손 망치, 곡괭이며, 중앙에는 '포페르'를 뜻하는 P자가 적혀 있다. 포페르가 독살당한 이후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이곳 영토를 나눠 갖기로 합의한다. <189~195쪽>

1943. 저지에서 발행된 우표. 도안은 해초 따는 사람들 묘사. [사진=흐름출판]
1943. 저지에서 발행된 우표. 도안은 해초 따는 사람들 묘사. [사진=흐름출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채널 제도의 인구는 약9만2,000명이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철수하고는 채널 제도가 방어해야 할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독일도 채널 제도 점령을 대단한 전략적 쾌거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에게 채널 제도는 영국 땅을 처음으로 일부나마 점령했다는 선전상의 의미가 컸다. 전 세계의 모든 지배 세력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이곳에서 우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독일 우표를 사용하는 대신 현지 도안가들에게 작업을 요청했다. 우표의 도안을 맡은 에드워드 윌리엄 블램피드는 교묘하게 메시지를 숨겼다. 해초 따는 사람들을 묘사한 3펜스짜리 우표는 액면가 위에 뒤집힌 V자가 씌워져 있다. 게다가 꼬부라진 장식 곡선 두개는 '조지 렉스'의 머리글자인 'GR'로 읽힐 수 있다.('렉스'는 왕을 뜻하는 라틴어로 왕의 이름 뒤에 쓰임). 다시 말해 영국 국왕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으로 해석할 만한다. 채널 제도는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기 전에 해방됐다. <344~351쪽>


『오래된 우표, 사라진 나라들』
비에른 베르예 지음 | 홍한결 옮김 | 흐름출판 펴냄│432쪽│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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