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예능의 시골 라이프… ‘환상 속 그대’
힐링 예능의 시골 라이프… ‘환상 속 그대’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9.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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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MBN 예능 프로그램 '자연스럽게' 공식 홈페이지]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시골이 TV에 많이 나온다. tvN에서 방영 중인 ‘삼시세끼’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외에도 연예인들의 시골 마을 정착기를 담은 ‘자연스럽게(MBN)’, 10대 농부의 성장기를 담은 ‘풀 뜯어먹는 소리(tvN)’ 시리즈, 어촌으로 낚시를 떠나는 ‘도시어부(채널A)' 등 시골을 배경으로 한 프로그램들이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다.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나는 자연인이다(MBN)' 역시 마찬가지다.

왜 대중 매체는 도시가 아닌 시골 라이프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시골에는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삶을 사는 도시인들에게 자연으로 대변되는 시골의 풍광은 그 자체로 낭만과 힐링의 공간이다. TV 속 연예인들은 회색빛 빌딩을 벗어나 자연의 오색찬란함 속에서 밥을 지어 먹고, 이웃 간 정을 나누며, 시골 인심을 한껏 즐긴다. 그렇다면 이 프로그램들을 지켜보는 ‘진짜 시골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참외 농사를 짓는 정모씨(55)는 ‘농업 예능’을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배추 몇 포기 심고, 감자와 옥수수 서너 박스를 따고는 넓은 마당에 삼삼오오 모여 족구를 하더라. 농사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보기엔 좀 불편한 게 사실이다. TV에서 저런 모습만 나오니 일부 도시 사람들이 ‘망하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라는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산나물을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여모씨(27)는 도시에 사는 친구들로부터 여유로운 시골 라이프가 부럽다는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다. 그는 “농업인에겐 출퇴근 개념이 없다. 자다가 심한 바람 소리에 깨기라도 하면 삽을 들고 뛰어가 비닐하우스가 괜찮은지 살펴야 한다”며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 시선은 조금 폭력적이다. 여기도 도시의 삶과 마찬가지로 전쟁터다”라고 토로했다.

중학생 자녀를 둔 주부 김모씨(44)는 “시골에는 교육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주말을 이용해 아이들을 인근 도시에 있는 학원으로 보낸다. 교육 문제뿐만 아니라 여기에만 있으면 아이들이 너무 도태되는 것 같아 시간이 날 때마다 도시의 삶을 체험하게 한다”며 “누군가에겐 시골이 안식의 공간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중 매체가 시골 생활을 너무 미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환희의 논문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의 서사전략과 환상적 사실성」에 따르면 대중 매체에서 그리고 있는 시골은 “의도적으로 구성된 결과물”이다. 저자의 말처럼 프로그램 속 연예인들은 일상적 과업은 수행하지만 그 안에 치열하고도 고단한 ‘생업’은 누락돼있다. 프로그램에서 그려지는 간단한 노동만으로는 실제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프레임 안에 담기는 모든 노동과 인물들은 ‘낭만성’이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저자는 “이처럼 지속적으로 환상적 사실성을 부여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구성은 ‘바로 그 장면’에 존재하는 문제와 모순을 낭만적 현실로 가장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즉 TV 프로그램이 묘사하는 시골의 모습은 현실을 가장한 ‘환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환상 속에서 도시보다 객관적으로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갖춘 시골은 어느 순간 유토피아의 공간으로 변모돼 TV에 전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시가 실제 그곳에서 힘겹게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겐 기만이자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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