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임신중지』
[책 속 명문장] 재생산을 둘러싼 감정의 정치사 『임신중지』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9.1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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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 책은 임신중지에 대한 ‘상식적인 감정’을 꾸준히 검토한 첫 번째 연구다. 여기서는 임신중지와 반복적으로 엮이는 특정한 감정들이 여성에게 임신중지의 문화적 의미를 각인한다고 본다. 임신중지를 ‘잘못’이나 ‘죄악’으로 노골적으로 명명하는 대신에 ‘선택’이라는 수사를 끌어들여 감정을 작동시킨다는 이야기다.<10쪽>

여성해방론자들은 임신중지권이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의 몸과 삶을 통제할 권리’로 여겨져야 한다고 믿었다. WAAC 잡지 『선택한 권리!Right to Choose!』는 WLM(Women’s Liberation Movement)이 ‘결코 스스로를 우선시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비평하는 주된 장이었다. 활동가들은 임신중지에 가해지는 규제가 결혼과 가족이라는 두 제도에 여성을 붙박아 둔다고 주장했다. 결혼과 가족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남성의 소유물로 만들며 여성이 해방되지 못하게 한다”고 말이다.<66쪽>

예를 들어 대중매체에서는 ‘고학력자이지만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어머니를 높이 산다. 그러나 이는 파트너가 이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능력이 되는 백인 중산층 엘리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다른 맥락에서 보자면, 여성은 양육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직업적 삶을 조정해야 한다. ‘일/삶’의 균형이나 ‘탄력근무제’ 같은 말이 자꾸 돌고 돌면서 일하는 어머니의 삶을 묘사하는 데 쓰인다(하지만 아버지의 삶은 대개 그런 식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게다가 여성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경향이 남성보다 훨씬 높다.<98쪽>

예컨대 여성이 남성 파트너와의 안전한 섹스를 협상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피임기구의 엄격한 사용이란, 제약 없는 즉흥적 섹스 등 보다 광범위한 섹스 이데올로기와 불일치하기도 한다. 이때 피임기구 사용에 대한 젠더화된 책임이 덧씌워져,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에게 재생산 능력을 통제하라고 하는 것이 남성에게는 같은 정도로 적용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여전히 재생산과 모성에 결합돼 있다는 뜻이다. 이는 남성의 성적 신체에서 재생산을 지우는 한편 쾌락을 특권화함으로써 가능해졌다.<188쪽>

우리가 임신을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인 조건으로 바라볼 때, 임신한 여성의 감정세계는 고정되는 대신 다양해진다. 사라 아메드는 자유가 “세상에 응답할 자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항해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행복을 방어하지 않고도 따라오는 자유”를 포함한다고 말했다. 임신한 주체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주체에 ‘원치 않게 임신한 여성’을 포함하는 일은 오늘날 임신중지를 엄격한 규칙과 감정경제가 아닌 잠재력을 통해 바라보게 한다. (중략) 모성을 해체해 여성에게 행복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임신중지를 분명 여성의 선택으로 새롭게 프레이밍하되 자율적 행위자가 내린 선택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획에는 오늘날 임신중지의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들에 균열을 내는 과정이 있다.<257쪽>

『임신중지』
에리카 밀러 지음 | 이민경 옮김│arte 펴냄│352쪽│2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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