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보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영화
'뷰티풀 보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영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9.1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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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뷰티풀 보이>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약물 중독에 걸린 아들이 있고, 그를 고통스럽게 지켜보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아들은 점점 죽음과 가까워진다. 아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버지. 아버지의 흔들리는 마음을 지켜보는 일은 힘들다. 아버지는 왜 아들을 포기하지 못할까. 펠릭스 반 그뢰닝엔 감독의 <뷰티풀 보이>(2018)는 이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처절하고도 아픈 대답이다.

닉 셰프(티모시 샬라메)는 호기심 많고 재기 발랄한 소년이다. J.D. 샐린저와 하퍼 리의 소설을 탐독하고, 장 뤽 고다르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즐기며, 글쓰기와 서핑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닉은 아버지 데이비드 셰프(스티브 카렐)의 뷰티풀 보이이자 전부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이혼으로 인해 닉은 일상에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심리 치료를 받다가 결국 마약에 손을 대기에 이른다.

약물 중독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닉과 그런 아들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데이비드의 고군분투를 영화는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뷰티풀 보이>는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 한 동명의 원작 에세이를 바탕으로 한다. 사실의 이야기가 극영화로 재구성된 것. 이에 따라 영화는 극영화의 형식을 따라가면서도 일정 부분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해 내러티브에 ‘드라마틱한 사실감’을 부여한다.

카메라는 불필요한 움직임을 자제하며 거의 고정된 상태에서 시공간을 프레이밍한다. 카메라는 주로 아이 레벨의 미디엄 쇼트로 인물을 포착하는데, 이러한 쇼트는 관객이 피사체가 처한 상황을 왜곡 없이 수용하는 결과를 이끈다. 인물 사이를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시종일관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자 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닉과 데이비드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파하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사실적인 촬영 기법과는 반대로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이 끊길 정도로 무질서한 플래시백(flashback, 과거 회상)을 자주 사용한다. 현재와 과거가 다소 난잡하게 뒤엉키는 영화의 진행 방식은 플래시백의 또 다른 의미(마약을 갑자기 끊을 때 일어나는 환각증을 이르는 말)와 조응하며 이야기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영화는 소재와 형식 모두에 천착하며 내러티브에 입체적인 질감을 더한다.

이야기를 생동하게 하는 건 무엇보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다. 잠든 닉을 쓰다듬을 때 데이비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논의 ‘뷰티풀 보이’의 선율은 보는 이의 가슴에 진한 슬픔의 정경을 남긴다. “아빠가 여기 있어. 아름다운, 아름다운, 아름다운, 아름다운 아들아. 길을 건너기 전에 내 손을 잡아.” 이와 함께 영화는 너바나와 시규어 로스의 음악으로 서사를 적절히 조율하며 장면과 장면을, 영화와 관객을 연결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산 사람을 애도하는 삶은 너무나 괴롭다.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사람은 여리고 연약하다. 약물 중독으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고백과 닉의 상황을 교차 편집한 시퀀스는 삶의 전부라 여겼던 것이 무너져도 끝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한다. 여기서 카메라는(혹은 관객은) 고통으로 점철된 피사체를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일밖엔 할 수 없다.

‘카메라는 왜 인물에 다가가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삶의 근본적 질문과 맞닿아있다. 그것은 영화가 롱 쇼트(멀리찍기)를 활용하는 방식, 즉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고, 그저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명제와 일치한다. 원작자도 스콧 피츠제럴드의 말을 빌려 얘기하고 있지 않는가. “당신은 그들을 도울 수 없으니 모든 것이 암담하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데이비드의 헌신적인 사랑에 닉이 미약하게나마 응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닉은 한 번도 데이비드를 사랑한 적이 없다.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에 감읍한다. 그런 점에서 닉의 마지막 눈물은 영화 초반부터 두 부자가 주고받았던 말.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가 모두 담긴 “Everything”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을 울린다. 아들의 눈물에 아버지도 운다. 자식만 부모의 한이 되는 게 아니라 부모 또한 자식의 한이 되는 것이리라.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닉은 데이비드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끝내 일어설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아니, 아버지를 위해서. <뷰티풀 보이>에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언어의 형태로는 도저히 산출할 수 없는 어떤 정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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