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10년간 IT 통신회사에 다니며 두 번의 임신과 출산으로 복직과 퇴직의 기로에 섰고, 그때마다 깊은 불안에 휩싸였다는 워킹맘 황유진은 밑바닥까지 떨어진 그의 자존감을 치유해준 것이 다름 아닌 한 권의 그림책이었다고 말한다. 서커스 광대인 난쟁이 ‘듀크’와 재주 부리는 곰 ‘오리건’의 여행담 『오리건의 여행』이 저자에게 새로운 길을 찾으라는 용기를 줬듯, 저자는 그림책이 자신과 비슷한 우울한 어른들을 위로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 책을 썼다. 책은 저자가 진행하는 그림책 함께 읽기 모임에 참석한 이들의 경험에 비춰 그림책을 재해석하고,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나눈다. 그림책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가이드북이다.
마침내 오리건에 도착한 오리건은 더 이상 두 발로 걷지 않는다. 언제 자신이 서커스단에 갇혀 있었냐는 듯이 네 발로 자유로이 산을 오르며 곰의 본성을 되찾는다.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다는 듯이 뛰고 먹고 잠든다. 곁에서 하얗게 밤을 지새운 듀크 역시 빨강 코를 떼고 홀로 길을 떠난다. 빨강 코가 떨어진 새하얀 눈밭에서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함께 들리는 듯하다. <39쪽>
시리얼 하나 간신히 들어 올리던 작은 소년이, 고래를 구출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거듭했을까 싶어 책장을 다시 넘겨본다. 뾰로통하던 아이의 얼굴이 비밀을 품은 이후 얼마나 생기에 넘치는지를 바라본다. 그렇게까지 집중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간절히 필요해지는 순간까지 다니엘이 말없이 기다렸기 때문이다. <47쪽>
제각기 다른 질문을 골라서 재미있지만, 같은 질문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흥미를 끈다. 예를 들면 “세상은 말을 가볍게 여기지요. 당신은 말을 믿나요?”라는 마지막 질문을 이해하는 방식이 각기 달랐다. 이 책을 함께 읽었던 동생은 “말은 글과 달리 내뱉는 순간 날아가 버릴 수 있지만, 그래도 말에 담긴 선의를 존중하느냐는 질문인 것같다”고 해석했다. “말을 가볍게 여기는 세태에 상처받은 적이 있느냐”라는 뜻이 담긴 듯하다고 해석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나는 우리가 말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기 때문에 “관계에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느냐”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69쪽>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작은 문제는 어느새 네모 씨의 온몸과 마음, 시간과 생각을 지배하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약점에 한번 사로잡히면 뭘 해도 이 약점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중략) 『중요한 문제』에서는 원형탈모 문제를 다뤘지만, 약점이 외양에만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남들 눈에 잘 띄는 약점이 있는가 하면, 남들 모르는 데 자리 잡아 나만 아는 약점도 있다. 『아나톨의 작은 냄비』는 누구에게나 있는 약점을 ‘냄비’라는 사물에 빗대어 표현한다. <95~97쪽>
『어른의 그림책』
황유진 지음│메멘토 펴냄│352쪽│1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