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지친 당신이 봐야할 ‘힐링 도서 영화’
인간관계에 지친 당신이 봐야할 ‘힐링 도서 영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9.06 16: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대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에 피로함을 느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무의미해지지 않기 위해서 타인과 적당히 거리를 둔다. 이렇게 거리를 두다 보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만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간격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고, 롤랑 바르트는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라고 했다. 가족 간의 결속, 연인과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슬픔을 안겨준다. 하지만 인간(人間)이라는 단어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은 사람 사이에 있을 때 비로소 존립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다”라고 했던 작가 휴 엘리어트의 말은 때에 따라 관계라는 것이 누군가에겐 삶의 전부일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간격과 관계를 일깨우는 영화와 책이 있다. 이러한 텍스트들은 세상을 오롯이 직시하는 것보다 가끔은 한 겨울 김이 서린 버스 창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세상이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혹은 더 진실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나도 너처럼 아프고 힘들다고 말하는 영화와 책들을 통해 상실의 계절을 버텨보자.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사랑은 늘 이별을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은 “언젠가 꼭 이별을 하고 말거야”라는 다짐과 같다. 사랑은 왜 이별인가. 이별은 왜 그토록 우리를 아프게 하는가. 한때 눈물이 날만큼 소중했던 당신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어서? 아니다. 이별이 우리를 진실로 아프게 하는 이유는 당신을 상실했다는 고통이 언젠가는 무뎌진다는 서글픈 사실 때문이다.

노희경은 자신을 지키느라 사랑을 잃었다고 술회한다. 누구를 죽을 만큼 사랑하지 않으니, 아무도 나를 죽을 만큼 사랑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전부를 주어도 얻을 수 없고, 하나도 주지 않았지만 얻을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니던가.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노희경의 지인처럼 나를 버려보자. 그것이 오히려 나와 너를 얻는 일이 될 수도 있다.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은 <브로크백 마운틴>(2005)이나 <문라이트>(2016)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밝고 상큼한 톤 앤 매너의 퀴어 영화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의 싱그러운 여름이 그러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영화의 OST로 사용되는 음악들 역시 마찬가지다.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올리버 역시 엘리오에게 자꾸만 눈길이 간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마침내 한 침대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나눌 때, 둘은 제목 그대로 각자의 이름을 서로에게 불러준다. 불러라(Call). 나를(Me). 너의 이름으로(By your name).

종국에 올리버는 자신의 삶을 위해 엘리오를 떠난다. 상심에 젖은 엘리오에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단 한번 주어지지. 몸과 마음은 갈수록 닳아 헤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져. 지금 너의 그 슬픔 그 괴로움을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엘리오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는 모두가 홍역처럼 치르는 ‘이별의 고통’만 견디면 된다. 부유하고, 시간 많고, 잘생겼고, 예술적 재능이 있고, 백인 남성이고, 부모가 그의 정체성을 지지하니까. 그렇지만 엘리오는 울음을 운다. 아프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타오르는 장작불에 비친 엘리오의 얼굴은 청춘의 이별 그 자체를 표상한다.

언젠가 엘리오는 올리버를 원망하지 않고, 그와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남자가 되지 않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엘리오에게 올리버는 아름드리나무 같았다. 한품에 안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는. 그렇다면 올리버에게 엘리오는 무엇이었을까.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주인공인 ‘다자키 쓰쿠루’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친하게 지냈던 네 명의 친구들로부터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한 채 그룹에서 추방당한다. 그로부터 1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당시의 아픔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는 쓰쿠루에게 연인인 ‘사라’는 그 네 명의 친구들을 찾아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그리하여 쓰쿠루는 16년 전에 자신을 매몰차게 버렸던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는 일종의 ‘순례’를 떠나게 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내면에 담아 두었던 상처를 복기하는 형식의 이야기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쓰쿠루가 왜 버림을 당했을까?’라는 궁금증과 함께 하루키의 감각적인 직유는 자칫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에 풍성함을 더한다.

소설에는 소설의 OST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 등장하는데, 바로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 - 제1년 스위스’ 중 여덟 번째 곡인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라는 곡이다. 제목을 번역하면 ‘전원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다. 관계의 고통에 관한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곡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