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 후기 - “나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나요?”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 후기 - “나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나요?”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30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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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장혜영 감독님, 존경합니다.”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SWIFF)에서 ‘박남옥상’을 수상한 장혜영 감독에게 변영주 감독이 건넨 말이다. ‘박남옥상’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을 기리는 상으로 ‘SWIFF’에서 매해 여성영화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한다. 수상을 하고 무대를 내려가는 도중에 이 말을 들은 장 감독은 사회를 보고 있는 변 감독 쪽으로 몸을 틀었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올해 ‘SWIFF’의 첫 풍경이었다.

장 감독은 중증 발달장애를 지닌 여동생과의 일상을 녹여낸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2018)을 연출한 신인 감독이다. 변 감독은 까마득한 후배인 장 감독에게 존경의 찬사를 전했다. 매해 ‘SWIFF’를 찾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장면들이 영화제 내내 일상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성별, 나이, 인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오롯이 영화 그 자체를 즐기는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태도는 “벽을 깬다”라는 영화제의 슬로건과 맥이 닿아있다.

‘영화 그 자체를 즐긴다’라는 말은 ‘SWIFF’의 공식 트레일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2003)를 연상케 하는 이 트레일러는 ‘소공녀’(2017)를 연출한 전고운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 두 여성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있다. 한 여성이 “영화 시작한다(The movie starts)”라고 말하자, 다른 여성이 “가자(Let's go)”라고 한다. 그리고 끝난다. 영화제란 고로 영화를 보고, 듣고, 맛보고, 즐기는 곳이다. 전 감독은 영화제의 의의와 취지를 1분 남짓한 트레일러에 감각적으로 녹여냈다.

‘SWIFF’의 본격적인 소개를 위해선 앞서 잠깐 언급한 박남옥 감독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박남옥은 이민자, 이택균, 최남현 등이 출연한 ‘미망인’(1955)의 연출을 맡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다. ‘미망인’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어린 딸과 살아가는 여성이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미망인’은 1997년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됐고, 이를 계기로 박남옥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재조명됐다. ‘미망인’은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SWIFF’는 국내 유일의 여성영화제로 “여성영화인 네트워크 확립 및 발굴, 제작 지원” “여성영화를 통한 다양성 영화 확산” “한국 여성감독 영화의 세계 진출 확대”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올해로 21회째를 맞은 ‘SWIFF’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한국 여성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다. 이번 영화제에는 총 31개국에서 출품된 119편의 영화들이 상영된다. 특히 올해 운명한 여성영화의 거목 아녜스 바르다와 바바라 해머를 기리는 추모전이 마련돼 관객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랠 예정이다.

‘SWIFF’의 개막작으로는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의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2018)가 상영됐다. 영화는 그야말로 벽을 깨는 영화이다. 주인공 페트루냐는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심지어 백수인 여성이다. 역사학과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그녀를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다. 모욕적인 면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그리스 정교 ‘구세주 공현 축일 이벤트’에서 불현듯 십자가를 낚아챈다.

사람들은 이 이벤트에서 가장 먼저 십자가를 낚아채면 큰 축복이 온다고 믿고 있다. 그 일은 전통적으로 남성만이 할 수 있었고, 수많은 남성이 십자가를 가장 먼저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페트루냐는 그 금기를 깨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십자가를 손에 쥔다. 이로 인해 그녀는 여러 고초를 겪지만 좌절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페트루냐의 강인한 의지를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힘껏 담아낸다. 똑똑하고, 당당하며, 거침없는 페트루냐를 당해낼 남성은 적어도 이 영화 안에는 없다.

영국의 페미니즘 영화이론가인 로라 멀비는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에서 카메라의 눈, 즉 키노 아이(Kino Eye)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눈이고, 모든 영화를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욕망이 투영된 결과물로 바라봤다. 멀비의 주장에 따르면, 사각형의 스크린 자체가 바로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틀의 은유인 셈이다.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에는 여성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페트루냐가 남성 면접관과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그 시선을 전복시키는 쇼트가 나오는데, 이를 블랙 코미디로 녹여내는 감독의 연출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영화는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길드필름상과에큐메니칼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올해 'SWIFF' 개막작으로 선정돼 한국 관객과 처음 만난다. 오는 9월 1일과 4일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여성들이 ‘삶의 단독자’로서 영화에 등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수많은 영화인의 노고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SWIFF’는 성평등을 위해 힘써온 영화제다. 영화제 속 스크린에는 우리가 평소에 잘 만날 수 없는 게이 친구, 레즈비언 친구, 트렌스젠더 친구들이 나온다. 여성은 맞거나, 강간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그러니 함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SWIFF’는 그런 물음을 품고 있는 영화제다. 영화제의 스물한 번째 물음에 이제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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