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대폼장]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들이 짊어진 운명 『묻어버린 그 전쟁』
[지대폼장] 떠난 자와 남은 자, 그들이 짊어진 운명 『묻어버린 그 전쟁』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26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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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 전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보다 비전투 상황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전쟁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증오와 폭력과 이기와 비겁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너무 비극적이고 반인간적이다.<5쪽>

“훈식아!”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제는 50을 바라보는 장년이다. 아내는 이웃집 할머니요 아들은 친척 아저씨로 다가왔다. 승규는 평양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20대의 청년으로 남아있다. 고향을 떠나온 후부터 시간을 정지시켜놓고 살아온 것이다.<20~21쪽>

왜 서울에 남겠다고 말하지 못했던가. 그 여름 이후 석 달 동안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 한강을 넘었으면 이제 가족들과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래도 서울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몇몇 교인들은 구할 수 있었다. 교회 천장에 숨어 있는 백 장로 얼굴이 떠올랐다.<93쪽>

흘러내리던 눈물이 갑자기 멈추더니 알 수 없는 분노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정한 사람, 만삭이 된 아내를 남에게 맡겨두고 교회로 돌아간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소? 그 물음은 곧 자신에게 돌아왔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재규와 재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남편의 실체를 정부에서 알았으니 어쩌면 더 이상 내가 교직에 머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직장을 떠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25년 전에 떠난 남편 일이 오늘을 살고 있는 가족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 화났다.<217~218쪽>

승규는 토요일이 되면 마을 산책까지 쉬고서 하루 종일 사람을 기다리며 보냈다. 아무 계획도 없이 책을 읽다가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면 즐겁게 맞아 이야기를 나눴다. 농사일이며, 마을에서 일어난 자잘한 일이며, 겨우살이 준비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가오는 산촌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꼭 일이 있어서만 찾아오지 않았다. 가다 오다 들렀다.<321쪽>

기내 방송은 비행기가 지금 막 조국의 바다에 들어섰다고 전했다. 순간 승규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눈앞에 드러났다. 육지가 보인다. 평양이다. 안내원이 창문 커튼을 닫으라고 했다. 승규는 의자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숨이 가쁘다. 비행기가 저공으로 속도를 줄이면서 착륙 준비를 하더니 활주로에 부딪치면서 약간 요동했다.<409쪽>

『묻어버린 그 전쟁』
현길언 지음 | 본질과현상 펴냄│480쪽│18,000원

* 지대폼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폼나는 문장이라는 뜻으로 책 내용 중 재미있거나 유익한 문장을 골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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