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앨범’, 늦여름과 초가을에 피어난 싱그러운 멜로드라마
‘유열의 음악앨범’, 늦여름과 초가을에 피어난 싱그러운 멜로드라마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22 16:5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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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유열의 음악앨범’의 영어 제목은 ‘Tune in for Love’다. “사랑에 주파수를 맞추다”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제목은 영화의 전반적인 플롯(plot)과 닮아있다. 원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하기 위해 주파수를 맞추듯이, 두 남녀는 시종일관 ‘지지직거리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리고 끝내, 서로의 주파수에 가닿는다. 그러니까 낡은 것은 소재이지 이야기가 아니다. 정지우는 은막 위에서 숱하게 반복된 청춘 남녀의 그저 그런 사랑을 과거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우리 모두의 손끝에 소환시키며 또 한 편의 감각적인 멜로드라마를 탄생시켰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해피엔드(1999)’나 ‘은교(2012)’처럼 내밀하거나 파격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사랑니(2005)’처럼 몽환적이거나 결정적인 순간, 서사에 판타지를 입히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이번 영화는 정지우의 전작들과 비교할 때, 조금은 무난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마지막이 훤히 예상되는 이 평범한 이야기를 끝까지 지켜보게 만드는 동력은 빵집, 헌책방, 이메일, 라디오 등 90년대의 ‘느린’ 풍광들이 카메라와 뒤엉키면서 관객들에게 일종의 영화적 마법을 선사하는 데 있다.

영화적 마법이란 결국 피사체를 다루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있을 것이다. 특히 재기 발랄한 롱테이크(길게 찍기)가 눈에 띄는데, 여기서 정지우는 컷을 통한 장면 전환 대신 인물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래크 포커스(rack focus, 초점 이동)를 통해 극을 진행시킨다. 이러한 카메라 기법이 주는 효과는 해당 장면의 공간적 관계가 분절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는 점이다. 그것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예는 현우(정해인)가 군대에 가기 전날, 처음으로 미수(김고은)와 함께 잠을 자는 장면이다. 이때 카메라는 침대에 있는 현우와 바닥에 있는 미수를 개별 공간으로 구획하지 않고 래크 포커스로 담아내며 특유의 리듬과 템포를 통해 둘의 애틋한 사랑을 생생히 그려낸다.

다른 예는 미수와 현우가 빵집 앞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포착하는 장면이다. 이때도 카메라는 미수와 현우를 롱테이크를 활용해 좌에서 우로 유영하듯 한 호흡으로 찍어낸다. 다가가지만 밀착하지 않고, 멀어지지만 떠나버리지 않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실로 사려 깊다. 이 평범한 장면들을 ‘영화적 마법’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찰나적으로나마 순간을 보존하려 하는 정지우의 의지와, 지키고 싶었으나 끝내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두의 사랑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물리기 때문이다. 이 순간이 눈물이 날만큼 소중해서 “안 뺏기려고 찍었다”는 현우의 대사처럼, 카메라는 인물들의 소중했던 시공간을 든든히 지켜준다.

영화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은 떠나가는 미수를 현우가 힘껏 뒤쫓아 가는 장면에 있다. 미수가 끝내 돌아서자 카메라는 울음을 우는 현우를 롱쇼트(멀리 찍기)로 담아낸다. 이 장면은 다소 기이하게 촬영됐는데, 현우가 앵글의 중앙에 위치하지 않고 왼쪽 귀퉁이에 있다는 것. 현우의 뒤로 저마다의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스크린의 주된 배경을 이룬다는 것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전부라고 여겼던 연인과 헤어졌는데 그 뒤로 평범한 일상이 흐른다. 뛰지 않아도 될 거리도 열심히 뛰었던 사내가 뛰어야만 하는 거리를 사력을 다해 질주할 때의 정동(情動). 그 사내를 앵글의 중심에 담아내지 않고 그저 그런 일상과 함께 녹여낼 때의 아이러니(irony). 이 격렬한 모순과 부조화 속에서 현우는 통곡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바로 미수의 의붓언니 ‘은자’ 역을 맡은 김국희의 존재감이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다면 그녀의 역할이 다소 아쉬울 수 있다. 희생을 강요받는 전형적인 과거 한국의 여성상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자’의 존재감을 이렇게 쉽게 비판해버린다면, 오히려 캐릭터를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은자’는 미수와 현우가 고달플 때마다 찾아가 잠시 쉬어가는 그늘이 아니다. 그녀는 영화의 주된 소재인 ‘라디오’처럼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미수와 현우의 관계를 마음으로 이어주는 영화의 버팀목이자 풍경 그 자체이다.

미수의 어여쁜 미소가 담긴 한 장의 사진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에 ‘앨범’이 들어가는데, 앨범의 가치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후에야 빛을 발한다. 좋은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비로소 시작한다고 했던가.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피어난 이 싱그러운 멜로드라마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관객이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아무도 모르게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찬연히 빛난다. 왜냐고? 제목 그대로 ‘앨범’ 같은 영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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