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진 거듭하던 한국 공포 영화, ‘오컬트’로 날개 다나?
부진 거듭하던 한국 공포 영화, ‘오컬트’로 날개 다나?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1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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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공포 영화(horror film)가 여름 극장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열대야에 지친 관객들은 심야 극장을 찾아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가며 공포 영화를 관람했다. 여름 하면 공포 영화. 이런 도식이 관객들의 머리에 오랫동안 각인돼 있었고, 그 도식은 곧잘 영화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2000년대 초반 한국 공포 영화는 충무로의 효녀·효자였다. 요즘 말로 가격 대비 성능이 좋았다. 다른 장르에 비해 제작비가 저렴하고, 그렇기 때문에 신인 감독이나 신인 배우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대부분의 한국 공포 영화는 흥행과 작품성 면에서 모두 부진을 거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공포 영화를 개괄해보자. 우리는 여기서 판타스틱(fantastic) 장르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판타스틱 장르의 하위 범주에 공포 영화가 속해있기 때문이다. 판타스틱이라는 의미 안에는 ‘환상적인’ ‘엄청난’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이한’ ‘섬뜩한’이라는 뜻 역시 내포돼 있다. 전자에 SF 영화, 판타지 영화 등이 포함된다면 후자에 공포 영화가 속한다. 『영화 장르의 이해』를 저술한 정영권 영화평론가에 따르면, 판타스틱 장르 안에는 모두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놀랍고 신기한, 때로는 무시무시한 사건이나 캐릭터가 등장한다.

공포 영화는 주로 ‘무시무시한’이라는 형용사에 방점이 찍히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왜 무섭고 끔찍한 공포 영화를 즐기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공포 영화 속에는 우리의 억압된 욕망을 대신 표출해주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초자연적인 존재, 그러니까 귀신이나 괴물, 악령과 같은 존재는 인간 사회의 규범을 뒤흔들고, 관객은 그들의 파괴적인 행위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낀다. 다시 말해 관객은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비극적 상황을 마주함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등을 해소하고, 이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한국 공포 영화가 점차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그 ‘비극적 상황’이 진부해진 탓이다.

대표적으로 1998년부터 2009년까지 제작된 ‘여고괴담 시리즈’를 예로 들 수 있다. 영화 개봉 당시 반응은 거의 신드롬(syndrome)에 가까웠다. 첫 번째 시리즈의 경우 서울 지역 개봉관에서 62만, 전국 150만명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여고괴담 시리즈로 최강희, 공효진, 송지효, 김옥빈 등이 데뷔했고 이들은 현재 충무로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됐다. 여고괴담은 흥행뿐만 아니라 작품성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왕따, 성적 비관, 불우한 가정환경 등 당시 교육·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시대의 부조리를 반영했고, 그것을 공포 영화라는 장르에 적절히 녹여냈다. 하지만 매해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같은 이유로 죽어 나갔고, 소위 ‘유사 여고괴담’ 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면서 공포 감정을 촉발하는 스토리텔링이 진부해지자 공포 영화는 점차 관객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영화 '검은 사제들'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를 비롯해 한(恨)을 품은 여귀(厲鬼)가 주된 소재였던 한국 공포 영화는 최근 오컬트 영화(occult film)라는 하위 장르로 세분화하여 다시 관객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오컬트는 공포 영화의 한 갈래로 마술, 악령, 사후 세계 등을 다루며 주로 인간과 종교적 투쟁을 벌이는 악마들이 등장한다.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 스튜어트 로젠버그 감독의 ‘아미티빌의 저주(The Amityville Horror, 1979)’가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 영화로는 장재현 감독의 ‘검은 사제들(2015)’과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 등이 있다.

사실 오컬트는 외국과 비교해 한국에선 그리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악을 쫓아내는 구마 의식 또는 그것을 행하는 사제의 존재가 한국적인 감수성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한국의 전통적인 공포 영화가 부진을 거듭하고, 허무맹랑한 귀신이 아니라 실체적인 악마를 현실로 소환해 개연성 있는 공포감을 창출하는 오컬트가 산업적인 이유와 맞물려 자연스레 충무로로 소환됐다. 특히 ‘곡성’의 경우 개봉 당시 6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고, 평단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등 엄청난 화제와 담론을 생산해내며 한국 공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곡성'에는 기존 오컬트에 등장하는 구마 사제와 더불어 한국적 상황에 맞게 잡귀풀이를 하는 무당이 등장한다는 점이 색다르다.

오컬트는 아니지만 2018년에 개봉한 정범식 감독의 ‘곤지암’은 공포 감정 자체에 천착하며 공포 영화를 유튜브 형식의 유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로 풀어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유사 다큐멘터리란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통해 허구의 상황을 실제처럼 재현한 영화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파라노말 액티비티(Paranormal Activity)’ 시리즈가 있다. 이에 대해 정시우 영화저널리스트는 “관성에 기댄 기존 한국 공포 영화들과도 확실히 다른데, 해묵은 교훈 설파나, 원혼 타령이나, 인물 간의 관계를 과감하게 삭제하고 공포 그 자체에 주목한 것이 주효했다”라고 평했다.

이처럼 최근 오컬트나 유사 다큐멘터리 형식의 공포 영화가 한국 관객들에게 현실감 있는 공포를 제공하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 장르의 영화가 성공만 한 것은 아니다. 지난달 개봉한 김주환 감독의 영화 ‘사자’는 오컬트와 액션이 결합한 공포 영화로 박서준, 안성기 등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고, 작품성 면에서도 낙제점을 받았다. 지난 5월 유선동 감독의 ‘0.0MHz’ 역시 ‘곤지암’과 유사한 형식으로 개봉했지만 흥행에 참패했는데, 그 요인은 연출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 공포 영화들이 기존 관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적·형식적 변주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것만큼은 고무적인 일이다. 올 초에 개봉한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가 오컬트와 미스터리 스릴러가 결합한 공포 영화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오는 21일 개봉 예정인 김홍선 감독의 영화 ‘변신’ 역시 한국형 오컬트 영화를 표방하며 전 세계 45개국에 선판매되는 등 출발이 좋다. 한때 여름 극장가를 지배했던 한국 공포 영화가 오컬트라는 날개를 달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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