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떠나 한국서 굶어죽은 탈북자 母子... 살릴 기회 없었나
북한 떠나 한국서 굶어죽은 탈북자 母子... 살릴 기회 없었나
  • 서믿음 기자
  • 승인 2019.08.14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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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채널A]
[사진=채널A]

[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1944년 겨울, 25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필리핀 마닐라 인근 루방 섬에 파견된 오노다 히로 일본군 소위. 미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라는 임무와 함께 “절대 항복하지 말고 버텨라. 3년이건 5년이건 버텨라”란 명령을 받은 그는 전력을 다해 싸웠지만 이듬해 봄 상륙한 미군에게 패퇴한다. 병력 대다수가 사망한 상황에서 오노다는 깊숙한 오지로 숨어들었고,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상황을 알지 못한 채 1974년까지 무려 29년 동안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종전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고, 전해져도(종전 소식을 담은 전단지가 전해졌으나 미군의 심리전으로 오인함 ) 믿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귀향할 수 있었으나 종전 사실을 알지 못했던 오노다 소위의 일화는 최근 발생한 탈북자 모자 ‘아사’(餓死) 사건과 맥을 같이해 보인다. 도움받을 방법을 몰라 생활고를 겪다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씨 모자의 비극이 종전 사실을 모른 채 혼자만의 전쟁을 벌였던 오노다 소위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탈북자 한모(42)씨와 아들 김모(6)군은 지난달 31일 봉천동 한 임대아파트에서 요금 미납에 따른 단수조치에도 몇 달째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아파트 관리인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타살 혐의점이 없고 냉장고에 고춧가루 외에 먹을 것이 없었던 점, 통장 잔고가 0원이었던 점 등에 따라 굶주려 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건으로 탈북자 지원체계의 사각지대가 드러났다. 현재 국내 입국한 탈북자는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 12주간 머물며 사회적응교육을 받은 후 정착지원 혜택을 받는다. 5년간 최저 생계비와 의료비 등을 지원받고, 취업지원(고용지원금/무료직업훈련 ), 교육지원, 보호담당관제(거주지/신변 보호 ) 등의 정착 지원을 받는다. 설령 5년이 넘었다 해도 형편에 따라 보호기한을 연장할 수 있고 하나재단 등으로부터 도움 받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외부 교류가 사실상 전무했던 한씨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씨 모자를 살릴 수 있는 기회는 최소 다섯 번으로 추정된다. ▲2009년 12월 하나원에서 나와 서울주택공사로부터 아파트를 임차한 한씨는 숨진 채 발견될 당시 월세 16개월 치를 연체한 상황이었다. 통상 임대주택 월세가 3개월 이상 밀리면 지역개발공사가 보건복지부에 알리고, 복지부는 관할 주민센터에 전달해 상담/조사를 벌이지만 한씨는 재개발임대 아파트(영구/국민/매입 임대만 혜택 가능 )에 거주해 통지 대상에 속하지 못했다.

▲한씨는 관리비도 16개월간 연체했다. 전기료를 3개월 이상 체납할 경우 한국전력공사는 복지부에 통보하지만 해당 임대아파트는 전기료를 관리비에 포함하는 탓에 한전이 개별 가구의 체납 여부를 파악하지 못했다. ▲또 한씨는 중국동포와 결혼 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혼하고 지난해 10월 김군과 한국으로 돌아온 후 소득이 없는 상황에서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면 월 87만원의 생계비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런 도움을 받지 못했고 월 10만원의 가정양육수당만 받아왔다. ▲고용보험을 상실했으나 실업급여를 받지 않는 경우 고용노동부는 해당 실업자 정보를 보건복지부에 통보하고 있으나 한씨는 2013년 취업 당시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통보 대상이 아니었다. ▲만 6세 미만 아동에게 영양제를 제공하는 ‘영양플러스’ 혜택에 지원했다가 탈락한 전력이 있으면 ‘위기가구’로 분류돼 관리대상이 되지만 한씨는 이런 지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안내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운 형편을 본인이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가 드러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씨가 심리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이란 의견도 내놓는다. 탈북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혼과 생활고까지 겪으면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씨 이웃들은 “한씨는 항상 베이지색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고 누군가와 말을 나누지도 않았다. 늘 우울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4년 전 입국한 탈북자 A씨는 “탈북자 중 94%가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치료가 필요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다더라. 아마 한씨도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으나 주변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 같다”고 전했다.

유시민 작가는 책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복지 국가의 주요 기능과 관련해 “첫째, 개인 또는 가족에게 노동의 시장가치나 재산 수준과 관계없이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둘째, 질병과 노령, 실업 등 개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에 대한 불안을 줄이며 셋째, 계급적 귀속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보장한다”고 말한다.

위 기준에 따르면 한씨 모자는 어떠한 복지 혜택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해당 사건에 대한 온라인 댓글은 안타까움 표명과 복지 사각지대를 방치한 정부를 향한 비판이 대다수다. “안타깝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사라니” “월 10만원으로 아이와 살았다는 소리에 정말 미친 듯이 울었다” “국민이 굶어죽어도 대통령은 그 흔한 유감표명 한마디가 없네” “북한에 쌀 퍼주기 전에 내 나라 국민이나 잘 살펴라”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이 먼저라더니 탈북자 문제에서는 김정은 심기가 먼저인가” 등의 댓글에 유독 ‘좋아요’가 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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