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는 돌봄의 마음 『단순한 진심』
[책 속 명문장]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는 돌봄의 마음 『단순한 진심』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08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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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이름은 집이니까요. 서영의 두 번째 이메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름은 우리의 정체성이랄지 존재감이 거주하는 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는 뭐든지 너무 빨리 잊고, 저는 이름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예의라고 믿습니다.<17쪽>

그 기관사는 철로에서 나를 구한 사람이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그는 자신이 운전하던 기차를 급정거하여 그 기차에 치일 뻔한 나를 구했다. 멈춰 선 기차 앞에서 겁에 질려 울고 있던 신원 미상의 여자아이를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서나 고아원에 바로 보내지 않았고, 대신 어머니와 살던 집으로 데려가 문주라고 부르며 보호해주었다. 서영의 말대로 이름이 집이라면, 나는 그 이름 안에서 1년 가까이 거주한 셈이다.<20쪽>

특별한 날, 기분이 좋은 날, 기분 좋은 상태를 의심하다가 결국 비참한 기억에까지 가닿는 날, 아무런 근거나 맥락도 없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리란 예감이 드는 날, 나는 비상약을 찾듯 스크린의 바깥에 있는 문주를 소환하곤 했다. 문주를 상상하는 게 나는 좋았다.<58쪽>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시야가 닿는 모든 곳에서 여름 햇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은 질그릇 안에 퍼지는 녹색의 잉크처럼 당분간 내 몸속으로 번져 들어오는 여름은 그 농도가 더더욱 짙어질 터였다. 그건, 우주의 뼈와 피, 장기와 피부가 열매처럼 익어 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68쪽>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상이 되는 장면이 있었다. 사진 속 아이가 벨기에의 어느 국제공항에서 공포에 짓눌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장면, 낯선 집에서 악몽을 꾸다가 아연히 깨어나는 장면, 그리고 절대적으로 행복한 순간에도 버려진 사람의 불안과 고통을 아프게 환기하는 장면, 그런 장면이라면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었다.<146~147쪽>

엄마가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한때는 엄마의 전부였겠죠. 그것을 기억해 주세요……. 엄마, 하고 부르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은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을요.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부탁입니다. 엄마의 평안을 빕니다.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저의, 진심입니다.<253쪽>

『단순한 진심』
조해진 지음 | 민음사 펴냄│268쪽│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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