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느낌'있는 영화를 찾는다면, 이 영화 꼭 봐라
8월 '느낌'있는 영화를 찾는다면, 이 영화 꼭 봐라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03 08: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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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여름, 특히 8월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이제는 한국 멜로드라마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허진호의 첫 장편 영화.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다. 허진호가 관객들에게 처음 펼쳐 보인 스크린 속에는 아득하게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있고, 뜨거운 햇볕을 피할 시원한 그늘이 있으며, 무엇보다 지금은 마주할 수 없는 심은하와 한석규의 가슴 설레는 앙상블(ensemble)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은 수수할 뿐 무료하지 않다. 허진호가 채색한 여름날의 크리스마스에는 오래됐지만 때 묻지 않은 풍경만이 물끄러미 인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그 풍경 속에서 두 남녀는 잠시 만났다가 영원히 헤어진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 진부한 소재로 낡지 않은 이야기를 조각해내는 건 역시 연출의 몫이다. 허진호는 당시 최루성 영화(weepie)가 판치던 충무로에 멜로드라마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며 한국영화사에 의미 있는 변곡점을 찍어낸다.

동네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정원(한석규)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늘 웃는다. 그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사진을 확대해 달라는 초등생과 천진하게 어울리고,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무료로 정성스레 찍어주며, 홀로 남겨질 아버지에게 비디오플레이어 작동법을 세심히 알려주는 마음씨 고운 남자다. 그런 정원에게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바로 당찬 매력의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 다림은 인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정원에게 제목 그대로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다가온다.

주지하다시피 ‘8월의 크리스마스’는 죽음을 앞둔 남자와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엔 한국 멜로드라마에서 지겹게 반복되는 울고 불고와 눈물 콧물의 야단스러운 행위들이 예상된다. 하지만 영화는 이별 앞에서 소리 내어 울거나 사랑 앞에서 시답잖은 유난을 떨지 않는다. 울어도 아무도 보지 못하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고, 그 흔한 입맞춤은커녕 팔짱을 끼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다 설명하고 갈 필요는 없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카메라 역시 시종일관 인물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조자로서 그들을 바라본다.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를 사랑에 관한 시라기보다 기억과 세월의 변화에 관한 시로 읽었다는 허진호의 독법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작법에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제아무리 뜨거운 사랑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식기 마련이다. 그것은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일이, 그러한 순리가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그토록 곡진히 흔드는 이유는 연인들의 못다 한 사랑을 그려내서가 아니라 생의 전부였던 당신의 부재 속에서도 그럭저럭 살아지는 내 안의 딜레마를 이미지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림이 영화의 마지막에 지어 보이는 웃음은 시인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기다림의 자세’와 묘하게 맞물린다. 그러니까 사랑이 끝나면 이별이 오는 게 아니라 기다림이 온다. 그 기다림은 새로운 당신이 아닌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다. 엔딩으로 나아가는 15분 가까운 시간 동안 대사 없이 진행되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정원을 떠나보낸 다림의 기다림을 이미지로 승화시키며 지나간 사랑에 영화적 헌사를 바친다.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 영화 후반 정원의 내레이션

오래전 사진을 찍는 친구가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여행지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사진이 아닌 느낌으로 남아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여행 에세이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에서 말한 것처럼 “(여행의) 아름다움은 사진의 프레임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사진으로 기억한 풍경은 박제된 채 과거에 머물지만 느낌으로 기억한 풍경은 생물과도 같아서 언제나, 기어코 현재로 스며든다. 그래서 여행에서 남는 건 현재의 나를 추동시키는 그 어떤 느낌인 것이다.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다”는 정원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그래서 더 사무친다. 정원에게 다림은 사진이 아닌 느낌으로 남은 기억이자 삶의 혹독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던 시원한 그늘이었다. 그것은 손에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구상화된 실감이다. 눈물이 아닌 미소로 끝나는 이 기이한 멜로드라마는 그렇게 울음 없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엔딩 크레디트를 올린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에 개봉했지만, 현재에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 역시 ‘8월의 크리스마스’가 관객들에겐 잊히지 않는 그 어떤 ‘느낌’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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