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주의 영화롭게]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고한다... ‘김복동’의 ‘아이 캔 스피크’
[송석주의 영화롭게]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고한다... ‘김복동’의 ‘아이 캔 스피크’
  • 송석주 기자
  • 승인 2019.08.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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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송석주 기자]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영화 역시 시대와 인간을 반영한다. 시대와 인간의 변천과 흥망의 기록. 우리는 그것을 역사(歷史)라 부른다. 이 때문에 역사라는 장엄한 드라마는 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영화가 역사를 분별없이 도구화하면 큰 문제가 된다. 그간 ‘위안부’라는 고통의 역사를 스크린에 옮긴 많은 영화가 할머니들을 나약한 피해자의 모습으로만 표상하고 이른바 ‘재현의 윤리’를 기만하고 있을 때, 2017년에 개봉한 김현석 감독의 ‘아이 캔 스피크’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아이 캔 스피크’를 살펴보기 전에, 그렇다면 이제껏 충무로는 위안부를 어떻게 재현했나. 권현정의 논문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영화적 재현 양상」에 따르면, 종래의 위안부 소재 영화는 모두 피해자를 가녀린 ‘소녀’ 혹은 노쇠한 ‘할머니’의 이미지로 제시했다. 왜냐하면 ‘소녀’와 ‘할머니’라는 이미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희생된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가 위안부 피해자를 ‘소녀’와 ‘할머니’라는 정형화된 피해자의 이미지 틀 안에 가둘 때, 나아가 그들이 한 평생 고통에 신음하고, 자신의 삶에 떳떳하지 못한 무력한 존재로만 그려냈을 때는 할머니들에 대한 2차적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 문제는 위안부라는 역사의 비극과 젠더적 위계에 의한 폭력이 결합해 더욱 잔인하게 나타난다. 이때 순결을 잃은 ‘소녀’는 여성으로서 오롯할 수 없고, ‘할머니’는 주도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이미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즉 다분히 남성 중심의 시각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삶은 ‘소녀’에서 바로 ‘할머니’가 된다. 그렇게 늙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 사이의 시간, 그러니까 ‘소녀’와 ‘할머니’ 사이의 괄호 쳐진 세월 동안 피해자가 영위해온 삶은 그야말로 무(無)로서 존재한다. 우리는 피해자의 표면적 ‘고통’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들이 버텨온 ‘삶’에는 무관심했고, 무감각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등장하는 위안부 피해자 역시 ‘소녀’와 ‘할머니’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결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주인공 옥분(나문희)은 이웃들에게 ‘도깨비 할매’라는 문제적 인물로 명명된다. 그녀는 온 동네 불법 흔적을 찾아내 신고하는 열혈 시민이며, 구청 직원들에게는 블랙리스트 1호인 ‘민원 왕’이다. 옥분이 사사건건 이웃 상인들의 일탈과 불법에 일침을 가하는 탓에 주위는 그녀를 불편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니까 옥분은 노쇠하지도, 무력하지도 않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참혹한 과거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지도 않는다. 심지어 타인에게 불편함도 준다. 이는 이제껏 우리가 영화에서 접한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다.

‘아이 캔 스피크’가 소녀를 재현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일본군에 의해 소녀들이 강간당하는 장면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는 정심(손숙의 아역 이재인)이 옥분(나문희의 아역 최수인)의 자살을 막아내고, 옥분이 자수를 새긴 손수건을 정심에게 건네며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포착한다. 이처럼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프레임 안에 전시하지 않음으로써 관음증적 포르노그래피에서 탈피한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지혜로운 카메라의 시선. 거기에는 자극적인 이미지들 대신 역사의 피해자들이 흘렸던 눈물이, 그럼에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고여 있다. 이로 인해 옥분과 정심은 ‘처녀성을 파괴당한 소녀’라는 남성 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다채로운 삶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옥분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이고, 더불어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아는 존재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원하는 방식으로 실천할 줄 아는 어엿한 삶의 단독자이다. 옥분은 위안부 피해자로서 ‘근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평범한 시민으로서 세상에 ‘존재’한다. 이는 영화가 단순한 공감과 연민을 넘어, 통감과 치유의 장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화 '김복동' 스틸컷 [사진= 네이버 영화]

오는 8일 개봉하는 송원근 감독의 ‘김복동’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속 김복동 할머니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쇠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강인한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였다. 영화의 앵글은 할머니의 피 묻은 ‘고통’이 아니라, 그녀의 용기 있는 ‘삶’을 포착한다. 과거의 고통을 회상하는 장면을 암막으로 처리해 할머니의 목소리만을 자막으로 담아내는 오프닝 시퀀스는 피해자를 존중하는 연출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차가운 골방에서 신음하지 않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의 만행을 알린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한다. 연대해야하기 때문이다. 피해자들끼리의 내부적 연대가 아니라, 사건 외부에 있는 많은 사람과 함께 손을 잡아야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김복동 할머니는 생존과 연대의 소중함을 안다.

고통의 전시가 아닌 고통의 통감. 중요한 것은 영겁에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지, 실시간으로 낭자하는 혈이 아니다. 이러한 연출로 인해 관객은 김복동 할머니를 무작정 연민하지 않으면서 역사의 비극을 떠올리고, 망국의 땅에서 청춘을 몰살당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비참했던 생을 생각한다. 나아가 영화는 김복동 할머니와 관객의 연대를 도모함으로써 화합과 치유의 길을 모색한다. 상처의 본질과 위로의 방법을 지혜롭게 체득한 연출은 관음하지도, 방관하지도 않는다. 피해자를 존중하고 관객들에게는 연대의 손을 내밀며 끝내 화합과 치유의 장을 만들어 낸다.

[사진= 연합뉴스]

생전 김복동 할머니의 회고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에서 김숨 작가는 그녀를 “20년 가까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분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했던 권리와 존엄성 회복을 위해 성실히 활동가로 살아온 분”이라고 회고했다. 인간이 인간이길 위해 투쟁했던 인간 김복동의 고단했던 삶. 하지만 그 누구보다 숭고하고 존엄했던 삶. 위안부 문제에 이어 강제노역 배상 판결로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하는 일본의 적반하장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속 할머니의 외침이 더욱 그리워진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끝까지 싸우다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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