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떤 동행
[칼럼] 어떤 동행
  • 독서신문
  • 승인 2019.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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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재홍 발행인
방재홍 발행인

[독서신문] 새벽 4시 내리막이 급한 언덕길은 드문드문 밝힌 가로등과 아파트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으로 그리 어둡지 않았다. 가로수는 자신 몸통보다 굵은 네 발 나무 지지대에 허리를 맡긴 채 간간히 부는 바람에 몸을 기울인다. 외지 어디선가 시커먼 고무줄에 묶여 와 심겨졌을 저 나무들, 그래도 이파리는 제법 달려 후두둑 소리를 내 비가 그치지 않았음을 알린다.

보도블록 틈새를 메우며 두 개의 우산 밖으로 나온 그림자 둘, 빠르지는 않아도 잘 아는 길을 가듯 멈춤이 없다. 보폭도 차이가 나고 생김새는 완연히 다른데 앞선 그림자는 열두어 걸음마다 뒤를 돌아본다. 뒷그림자 사내가 ‘아’ 하는 거친 바리톤에 걸음이 흔들리며 신발 끄는 소리가 커지는 것과 거의 동시다.

‘아’ 소리 뒤를 물고 이어지는 얕은 ‘하’가 탄식인 듯 한숨인 듯 해 앞 그림자는 잠시 우산을 들어 뒤 사내 표정을 살핀다. 자신의 안경에 가는 빗줄기가 사선을 긋는 줄도 모르고.

뒷그림자 사내는 많이 취했다. 1년 반이나 하루도 못 쉬며 한 달 건너 반복되는 야근, 이런저런 손님을 상대해야 하는 스트레스, 거기에 벌이도 시원찮아 적금 하나 붓기 힘겨운, 아 이런 청춘이라니. 아프니까 청춘이라 했나. 강남에서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가 길어지며 자연스레 자기 모습을 보게 되니 정말 아팠던 것 같다.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가게에 도착한 게 새벽 4시 다 돼서다. 근무 교대할 시간이 4시간이 다 지났다는 뜻이다.

4시간을 더 일한 아버지는 문을 걸어 잠가 가게를 파했다. 가게에 들어와 우산을 접으며 몸 따로 팔 따로 노는 탓에 ‘찍찍이’를 찾는 데 몇 번이나 실패한 아들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래 가자’ 눈으로 말했다. 엇갈리는 교대 탓에 둘이 같이 퇴근하기는 이 날이 처음이다. 아들 우산을 펴주고 자신도 우산을 펴 앞서 걷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탄식인 듯 한숨인 듯 ‘아’ 소리는 척수를 뚫고 심장을 관통했다.

비 오는 날 친구들과 어울린 술자리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연봉 얘기하고 여자 친구가 어쩌고저쩌고 신혼재미가 이러쿵저러쿵 했을 텐데, 대화엔 제대로 끼었을까.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혹 썰렁한 유머를 날리지는 않았을까. 그러다 ‘애쓴다’라는 소리나 듣지 않았을까.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나란히 선 것도 잠시, 다시 아들은 뒤처진다. 탄식인 듯 한숨인 듯한 ‘아’ 소리가 없어 돌아봤다. 쓰러진 건 아닌가. 손짓을 하며 빨리 가기나 하란다.

상념은 과거로 이어지고 빗방울은 우울함을 재촉한다. 풍파가 많아 사춘기 때 제대로 말벗 한 번 못해 주었고 대학 등록금도 겨우겨우 맞추었고 용돈커녕 교통비마저 빠듯하게 주어야 했던 ‘고난의 행군’ 시절은 아들의 성장기와 고스란히 겹친다. 그래, 공부 못한 게 애비 탓이다. 현재진행형인 그 고난을 아들은 ‘미래확실형’으로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그러고 보니 양복 한 벌 해준 적 없고 구두 한 켤레 사라고 내 돈 준 적 없는 것 같다. 인색한 애비다. 아들이 대여섯살 무렵, 세 식구 북한산 탁족 가서 돗자리 펴고 놀 때, 안주로 시킨 빈대떡을 많이 먹는다고 아들에게 화를 냈으니. 참으로 강퍅한 애비다. 웃음도 안 나오는 씁쓸한 삽화다.

빗속에 힘겹게 20분을 걸었다. 집에 거의 당도한 낮은 오르막, 어느새 ‘아’ 소리를 멈춘 아들은 이제 힘겨운 숨소리를 모아서 토하는 것 같다. 아버지도 어느덧 땀투성이다. 바지도 땀이 배어 언덕 오르는 데 걸음을 죈다. 비는 한결 가늘어졌다. 아버지는 반팔 티셔츠 팔 부분을 끌어올려 이마 땀을 닦는다. 아, 이 티셔츠, 아들이 사 준 것.

얼마 전, 일하면서 편하게 입으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며 툭 던져준 것이다. 아버지는 울컥하며 하늘을 본다. 그리고 죄 없는(?) 국가와 시대를 돌아본다. 아들이 사는 세상은 나아지기를 그렸는데... 구름이 몰려가며 달빛이 스친다. 장마가 그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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