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서울대 출신 소방관의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책 속 명문장] 서울대 출신 소방관의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9.07.31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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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초등학생 여자아이. 물에 빠짐. 두 명.’ 익수 신고는 소방서에서 상당히 중한 사건으로 꼽힌다. 사망률이 높고, 생존하더라도 예후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구명환과 구명조끼를 챙겨 구급차에 올랐다. 차 안의 뜨거운 공기 탓에 호흡은 더 빨라졌다. 사이렌을 울리고, 상황 파악을 위해 최초 신고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보다 더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트 경기장’. 문제가 생겼다. 지난번 수상안전교육을 기억해보면 구급차는 경기장의 주차장을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주말의 주차장은 안전바에 의해 막혀 있어 열쇠가 꼭 필요했다. 사무실에 가서 미리 열쇠를 받아와 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당황한 아이는 말이 없었다. 콧대 높은 가을 하늘은 몇 안 되는 기회조차 빼앗아 가고 있었다. 

한 주기를 마친 대원을 뒤이어 가슴압박을 했다. 대원은 현장에서 얻은 정보를 전해줬다. ‘물가에서 놀다가 익수. 남자아이의 비명소리를 듣고 근처에서 서핑보드를 타던 여인이 건짐. 의식과 호흡 모두 없어 직접 가슴 압박 실시.’ 인공호흡을 섞지 않은 점만 빼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응급처치였다. 녹초가 된 그녀는 슈트 지퍼를 내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아까 봤던 아이의 눈보다 더 탁한 표정이었다. 제세동기가 분석을 마치고 눈치 없이 맑은 목소리를 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세동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땅을 두어 번 내리쳤다. 사실 동료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패드를 부착한 직후에 보인 곧은 직선. 무수축(asystole). 그 어떠한 세동도 없었다. 상황을 잘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심폐소생술(CPR)을 하는 우리를 응원했다. 들이치는 파도가 우리의 무력함을 약 올렸다. 저 넓은 바다는 혼자서도 규칙적으로 잘 움직이는데, 이 작은 심장조차 뛰게 하지 못한다니. 튀는 바닷물에 바짓단이 젖어갔지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9~11쪽>

“내가 죽겠다는데 왜 니들이 지랄이야!” (중략)

2018년부터 대한민국은 존엄사가 가능한 나라가 된다. 안락사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생명유지 연장장치를 사용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가족들에게 피해가 될 바엔 편안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퇴근 후에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오늘 들은 그의 외침과 존엄사 얘기를 해줬다. 지리학을 전공한 내 친구는 존엄사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고령사회가 도래하기에 국가가 선택한 인구 절감 대책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철학을 전공한 다른 친구는 나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자살 시도하는 사람을 막을 권리를 논하고 싶으면, ‘자신의 목숨을 끊을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먼저 해보라고 했다. <59쪽>

입을 열지 않던 학생은 구급원에겐 가감 없이 술술 털어놓았다. 대회 준비에 한창이던 지난달 학교 선배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학생의 동의를 구한 구급대는 경찰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병원을 나왔다. 

대회를 앞두고 부상을 당한 선수의 마음.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헤아리기 힘든 부분이라 생각했다. 아픈 발목을 이끌고서라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면, 올림픽에서 부상당한 선수 못지않게 슬펐을 것 같다. 그런 아픔을 불러온 학교폭력에, 원망하는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176~177쪽>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김상현 지음│다독임북스 펴냄│196쪽│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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