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명문장] 진정한 ‘자유인’ 김인선이 세상에 남기고 간 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책 속 명문장] 진정한 ‘자유인’ 김인선이 세상에 남기고 간 글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 김승일 기자
  • 승인 2019.07.2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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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승일 기자] 오솔길 밖으로 굴러 나온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이 도라지밭이었다. 커다란 나무 아래 하얀 도라지꽃밭이 오후의 비끼는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었다. 하얀 도라지꽃 귀퉁이에 보랏빛 도라지꽃 두어 줌 섞여 있었다. 그것은 찬송가였고 산상수훈이었으며 불설(佛說)이요 시천주의 주송(呪誦)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 후에 내 마음에 일어난 모든 궁상이, 그때 만난 그 도라지꽃밭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이요 어림없는 주석이 아니었나 싶다. <130쪽, 「장마에 도라지꽃을 보다」 中>

“거기서 뭐 하우?” 
“그냥 앉아 있수.”
“시는 안 쓰는 게요?”
“못 쓸 것 같소.”
“그럼 뭐 하려구?”
“세상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소.”
“근데 왜 앉아 있는 자세는 그리 호화스럽소.”
“난 지금…… 불행하우.”

하고 주억거리기에, 겉으로는, 별 궁상스러운 인간 다 보겠네 슬쩍 거드름을 피우면서도, 속으로는 가난뱅이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는 감통(感通)과 격려의 주문을 살포시 흘려주고는 그냥 와버린 십수 년 전의 기억이 있는데, 이제 낫살에 비곗살, 뽀얗게 살이 오른 얼굴에, 틀이 꽉 잡힌 말본새에, 아는 이야기 이 할에 잘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팔 할을 섞어 모두 다 제가 잘 아는 이야기인 것처럼 버무려서 눙치는 솜씨에, 두루, 골고루 올각질이 나다가도, 그날 그 엄정하고 단아한 종묘를 배경으로 반가부좌를 하고 배고픈 아가가 어머니 젖가슴 빨 듯 꽁초를 빨아대던 그 얼굴을 떠올리면, 그려, 그때는 저 안에 시인 비슷한 게 들어 있었던 건 틀림없었어! 그게 지금은 간이나 항문 부근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가 어떤가는 모르겠지만, 그때 잠깐 봤던 시인을 믿어보고 싶고, 어디 어떻게 사나 좀 더 두고 보자 하며, 괜히 마음이 약해지는 것이다. <143쪽, 「시인의 자세」 中>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 봄의 도래를 알리는 새는? 멧비둘기다. 초목으로 치면 버들가지와 같다. 지난 이월 십삼일 올해 멧비둘기 소리를 처음 들었다. 산기슭 개울가에서 막 겨울외투를 벗어부친 버들눈을 들여다보던 중에. 
박새는 최소한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 사실 박새소리는 겨울에도 들을 수 있다. 한겨울 박새, 진박새, 쇠박새, 곤줄박이 같은 박새식구들이 딱따구리와 함께 양지를 따라 종일 산을 떠도는데 이걸 혼군(混群)이라고 한다. 강아지들과 살 때는 강아지와 함께 혼군을 따라다니는 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소리를 들어보면 박새의 테마와 운율, 성조를 느낄 수 있다. 자연이 빚어낸 이 희한한 변주들. <358쪽 「박새」 中> 

『세상에서 가장 느린 달팽이의 속도로』
김인선 지음│메디치미디어 펴냄│380쪽│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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