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만진 여인
하늘을 만진 여인
  • 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 승인 2019.07.0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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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 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미세먼지 없는 쾌청한 날씨다.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에 떠밀려 발길을 시골 오 일 장으로 옮겼다. 시장에 도착한 후 구수한 음식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노점 식당을 찾았다. 몇 개의 테이블이 놓인 노점 음식점 안엔 낮술을 즐기는 촌부들로 시끌벅적하다.

그 틈에 끼여 막걸리 한 병을 청하고 자리에 앉아 있노라니 갑자기 구성진 음색의 음악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고개를 길게 빼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다. 양쪽 다리에 고무 튜브를 신고 한 손으론 땅을 짚은 채, 또 다른 손은 작은 손수레를 힘겹게 밀면서 장바닥을 기어 오는 여인 모습이 저만치서 보인다. 이내 여인은 식당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가까이서 보아하니 여인의 얼굴은 꽤나 곱상하다. 하지만 안쓰럽게도 곱사등이고 양다리가 없는 장애를 지녔다. 

이때 건너편에 앉은 늙수구레한 어느 남정네가 혀 꼬부라진 어투로 여인에게 반말 농지거리를 건넨다. “어이! 손수레에 실려 있는 물건이 전부 얼마야? 내가 다 팔아줄 테니 가격을 말해봐”라는 말에 여인이 끌고 온 손수레를 자세히 살펴봤다. 손톱 깎기, 수세미, 목욕타올 등의 잡화 등속이 손수레에 빼곡히 진열돼 있다. 이때 종전의 남정네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자신 앞에 놓인 빈대떡을 손으로 덥석 집어 여인에게 권한다. 한사코 싫다고 여인이 손사래를 치자 곁으로 다가가 억지로 부침개를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의 굽은 등을 마치 고양이처럼 한껏 말아 올리면서 몸부림을 친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나는, “아저씨! 장난이 너무 심합니다”라고 말하자 그 남정네는 불콰한 얼굴로 나를 잠시 쏘아보더니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여인은 전혀 얼굴빛도 고치지 않고 그 남정네를 향해, “고맙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녀 말에 남자는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여인 손에 쥐여주었다. 얼떨결에 돈을 받아든 여인은 돌연 결연한 말투로, “저는 행상을 할지언정 거지가 아닙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구입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남정네가 건네준 돈을 서둘러 되돌려 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자존심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나의 경우 자존심이 강한 게 단점이다. 하기야 이런 심리적 반응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존감이 높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십 오 년 전, 남편 사업이 갑자기 바람 앞에 등불이 된 적 있다. 나중엔 희미한 불빛마저 아예 사라져 가족들 생계를 위협받을 정도였다.

영락한 집안 형편을 마냥 지켜만 볼 수 없어 네 살배기 막내딸을 데리고 세탁소 물품 대리점에 경리로 취업을 했다. 말이 경리지 당시 그곳이 세탁소도 겸한 사업장이어서 세탁물도 갈무리해야 했다. 또한 끼니때 그 집 식구들 식사도 준비했다. 그야말로 파출부나 진배없었다.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막내딸을 데리고 다니며 그곳 일을 했다. 이 취약점이 사장의 갑질을 상당히 부추겼다. 걸핏하면 집안 허드레 일을 주저치 않고 내게 시켰다. 

어느 날 손님이 맡기고 간 세탁물을 다림질할 때다. 우연히 그곳에서 학교 동창과 마주쳤다. 그녀는 내 앞에서 자신에 대한 행복과 거머쥔 부에 대해 자랑스레 떠벌렸다. 심지어는 내가 결혼을 잘못한 것 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녀 말에 순간 자존심이 무척 짓밟히는 기분이었지만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어려서 어머니는 함부로 자존심을 상처받지 말라고 타일렀기 때문이다. “진정 자존심이 상할 때는 이지(理智)를 잃었을 때이다”라는 말씀을 늘 가슴 깊이 아로새기며 살아온 덕분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삶을 살며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기 마련이다. 기나긴 인생행로에서 그야말로 꽃길만 걷는 이가 얼마일까. 그래 평탄한 인생길을 추구하느라 우린 항상 높은 곳을 지향하나 보다. 신분상승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안위를 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고 모은다. 자본주의 체제에선 성공과 출세야말로 부(富)와 직결되는 통로나 다름없다. 성공과 출세를 하면 ‘그 후광이라도 입어볼까’ 하고 주위에 사람이 모이기 마련 아니던가. 사람이 모이다 보면 자연 물질도 좇아오는 게 세상 이치다.

높은 곳에 오를수록 부와 명예가 뒤따르기에 오늘도 많은 이들이 하늘과 같은 그곳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면 지나칠까. 그러나 시골 장터에서 만난 그녀는 모르긴 몰라도 단 한 번도 스스로 높은 곳을 향해 발돋움 한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러기는커녕,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땅만 굽어보며 살았지 싶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 기어코 하늘을 만졌다. 얼마나 아름다운 자존심인가. 남정네의 비하 섞인 언행 앞에서도 더욱 자신을 곧추세웠다. 또한 비록 장돌뱅이로 행상을 할망정 자신이 피땀 흘려 번 돈 외엔 단돈 몇 푼도 타인 것을 탐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소위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 요즘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내용을 지켜보노라면 높은 곳에 오를수록 발밑이 미끄럽다는 사실을 잊은 듯해 왠지 입맛이 소태를 씹은 듯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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