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기저귀 연정
[스미레의 육아에세이] 기저귀 연정
  • 스미레
  • 승인 2019.06.21 16: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천 기저귀를 쓸 거야. 아기에게도, 환경에도 더 좋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앞둔 친구가 말했다. 알고는 있었다. 다만 기저귀를 손수 빨고 삶고 말리는 행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을 뿐. 상상만으로도 덜컥 겁이 났다. 내겐 천 기저귀보다 기저귀 갈아주는 로봇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내 속도 모르고, 기저귀를 사게 되면 몇 장 줄 테니 써보라는 친구 말에 그러마 하곤 친정에 들러 물었다. “엄마, 천 기저귀 어떻게 썼어요? 새기도 하고 빨기도 역했을 텐데.”

엄마는 그때 꿈꾸는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셨다. “내 새끼는 응가도 예쁘더라” 

육아란 대체 어떤 것이길래 용변 처리의 장면마저 꿈처럼 남을까. 궁금하고 기이했다.

아이를 낳고서도 한참을 그랬다. 재우기, 어르기, 수유하기 등 눈앞에 닥친 대부분의 일은 어떻게든 해나갔지만, 기저귀는 어려웠다. 기저귀를 갈 때면 어찌나 긴장되던지, 주변에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로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야 겨우 손을 댈 수 있었다.

선배 맘들의 기저귀 교체는 평온하고 우아해 보이기까지 했는데, 손이 느린 나는 기저귀 한 번 가는데 진땀이 뻘뻘 났다.

친구에게서 받은 천 기저귀는 아기 수건이 되었다. 나는 소변 표시 선과 뒤 처리용 테이프가 달린 일회용 기저귀의 편리함을 모른 척할 수 없는 엄마였다. 봄에 태어난 아이가 몸을 뒤집자 여름이 왔다. 그즈음 천 기저귀 쓰던 친구도 백기를 들었다. 종일 몸이 녹아내릴 듯 고단한데 그 많은 기저귀를 날마다 어떻게 빨고 삶아 말렸을까. 문득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 기저귀 갈기는 이 둘 어디에도 속하지 못 하는 행위다. 그럼에도 반복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어느 틈엔가 나도 자동인형처럼 기저귀를 갈고 아이를 번쩍 안아 씻기는 씩씩한 엄마가 되었다.

발진이라도 나면 여간 고생이 아닐 테니, 아이가 기저귀 갈아달란 신호를 보내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이곤 했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한 선배 맘은 기저귀를 자주 갈아주면 아이가 예민해진다며 아이가 울 때 만 갈아주라고 조언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두고 보자니 아이가 달고 있는 묵직한 기저귀가 납덩이처럼 마음을 짓눌러오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은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애기 더워, 기저귀 좀 풀어놔!”

맞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났으니 기저귀 떼기를 시도해 볼 만한데, 선뜻 기저귀를 풀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가 이불이나 바닥에 실수할까 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 키우는 엄마에겐 세 번의 ‘떼기’ 고비가 있다고 한다. 젖 떼기, 기저귀 떼기, 한글 떼기. 두 번째 고비인 ‘기저귀 고비’만 넘겨도 그렇게 편하다던데, 나는 어서 편해지고 싶었다. 하루빨리 기저귀에서 놓여나고 싶어 마음이 들렁였다. 부랴부랴 아기 변기를 들이고 기저귀 떼기에 관한 동화책을 구해 읽어줬다. 하지만 조바심은 시기를 늦추는 법.

아이는 내 초조함을 읽었는지 변기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가 화장실에서 나를 불렀다. 쉬가 마려워 변기까지 왔는데 못 참고 변기 앞에 쉬를 했다며 내 안색을 살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본능적인 영역까지 남의 눈치를 보게 만들 권리가 내게 어디 있다고. 마음만 앞서서, 나만의 계획표에 아이를 맞추려 했다.

아이와의 생활에서 효율이나 비용 대비 성능, 즉각적인 효과 등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미처 몰랐다. 아이들은 3분 거리를 30분에 걸쳐 걷는 사람들이 아닌가.

갑자기 오간 데 없는 용기가 솟았다. 실수하면 어때, 닦으면 되지. 기저귀 못 떼고 어른이 된 사람은 없는걸. 기저귀를 풀어주자 아이는 중력을 잊은 듯 가벼이 날아다녔다.

그 모습에 나도 덩달아 신이 났던가 보다. 기저귀 떼라는 독촉은 쏙 들어갔고, 배변 훈련에 관한 책도 덮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배변 훈련에 성공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결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로봇이 그려진 남아용 팬티를 살 땐 신났지만, 남은 기저귀를 처분할 땐 시원섭섭했다. 기저귀 카트와 유아용 변기가 차례로 사라졌다. 기저귀 치수가 업될 때 느끼던 기쁨도, 마트 전단지에서 기저귀 쿠폰을 챙기던 일도 옛일이 되었다.

이제 아이는 여덟 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매일 늘어난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문을 닫는 어른스러움도 보인다. 마치 내가 모르는 세계로 빨려 들어가듯 그렇게.

하지만 손에 잡힐 듯한 과거엔 그런 날들이 있었다. 기저귀를 갈 때면 쉼 없이 파닥이던 팔다리, 눕히기 무섭게 뒤집어 기어가 버리던 작은 몸, 기저귀를 차고 엄마를 향해 팔을 뻗던 우리 아기. 아이는 알 길 없지만, 나로선 평생 잊지 못할 참으로 일방적인 기억이다.

기저귀 갈아주는 일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다. 그 덕에 귀한 아기 한 번 더 안아주고, 그 보드라운 맨살 한 번 더 만져주라고. 나 또한 그렇게 자랐음을 잊지 말라고.

기저귀 가는 로봇이 있더라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이 기저귀를 갈아 주었을 테다.

한때 내 엄마의 것이었던 사랑이란 추상이 어느새 내 안에도 뿌리를 내린다.

이 또한 참, 어쩔 수 없는 것.

서랍을 정리할 때면 아이가 수건으로 쓰던 천 기저귀와 마주친다. 그러면 아이가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던 그 소란한 날들이 왈칵 그리워 손이 멎곤 한다. 아마도 엄마가 지으시던 ‘꿈꾸는 표정’이 되어서는.

 

■ 작가소개

스미레(이연진)

자연육아, 책육아 하는 엄마이자 미니멀리스트 주부. 
아이의 육아법과 간결한 살림살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글을 쓰는 엄마에세이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비회원 글쓰기 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